2009년 10월 30일 금요일

[생각] 입법절차의 위법과 그 법률의 효력

이른바 미디어관련법(신문 등의 자유와 기능보장에 관한 법률, 방송법, 인터넷멀티미디어 방송사업법 등)의 처리과정상의 논란과 관련한 헌법재판소의 결정(2009.10.29,2009헌라8)이 있었다. 헌재의 결론을 요약하면 ‘절차는 위법’하지만, 국회의 입법자율권을 존중하여 그 법률들의 ‘효력은 유효’하다는 것으로 정리할 수 있을 것이다.

주로 입법과정상의 절차에 주목한 이번 결정에서는 신문법과 관련하여 재판관 이강국, 조대현, 김희옥, 송두환의 위법의견이 밝히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국회의 심의절차는 표결절차와 마찬가지로 국회에 의한 의사결정에서 생략할 수 없는 핵심절차로서, 의회주의 이념을 기초로 하는 국회 입법절차의 본질적인 부분이므로 국회법 제93조는 심의절차를 특별한 사유가 없는 한 반드시 거쳐야 할 절차로 규정하고, 특히 위원회의 심사를 거치지 아니한 안건에 대하여는 본회의의 의결에 의하여도 질의․토론 절차를 생략할 수 없도록 함으로써 안건에 관한 심의가 보장되도록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 사건에서는 신문법 수정안에 대한 질의· 토론신청을 할 수 있는 기회를 사전에 부여하였다고 볼 수 없으므로, 질의ㆍ토론절차를 생략한 피청구인의 의사진행은 국회법 제93조 단서에 명백하게 위반된다.”고 하였다.

또한 표결절차의 위법과 관련하여 재판관 이강국, 이공현, 조대현, 김희옥, 송두환의 위법의견이 밝히고 있는 바와 같이 “헌법 제49조가 천명한 다수결의 원칙은 국회의 의사결정 과정의 합리성 내지 정당성이 확보될 것을 전제로 한 것이므로, 법률안에 대한 표결절차가 자유와 공정이 현저히 저해된 상태에서 이루어져 표결결과의 정당성에 영향을 미칠 개연성이 인정되는 경우라면, 그러한 표결절차는 헌법 제49조 및 국회법 제109조가 규정한 다수결 원칙의 대전제에 반하는 것으로서 국회의원의 법률안 표결권을 침해”하는 것이다.

방송법과 관련하여 재판관 조대현, 송두환의 위법의견이 명백히 하고 있는 바와 같이 “질의와 토론의 기회를 실질적으로 부여하는 것은 의회민주주의 원리 등에서 도출되는 법률안 심의․표결권의 본질적 내용을 구성하므로, 질의․토론을 임의로 생략할 권한이 없는 피청구인이 장내소란을 이유로 질의․토론을 실시하지 않겠다고 공언한 것은 그 발언의 효력 유무와는 무관하게 질의와 토론을 사실상 불가능하게 할 수 있는 것으로서 피청구인의 자율적 의사진행 권한의 한계를 넘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따라서 각 법률의 무효확인청구에 대한 판단에서 재판관 조대현, 송두환의 인용의견이 언급하고 있는 바와 같이 “법률안에 대한 국회의 의결이 국회의원들의 심의‧표결권한을 침해한 경우, 그러한 권한침해행위를 제거하기 위하여는 권한침해행위들이 집약된 결과로 이루어진 가결선포행위의 무효를 확인하거나 취소”하여야 하며, 이러한 “가결선포행위의 심의·표결권한 침해를 확인하면서, 그 위헌성․위법성을 시정하는 문제는 국회의 자율에 맡기는 것은, 모든 국가작용이 헌법질서에 맞추어 행사되도록 통제하여야 하는 헌법재판소의 사명을 포기하는 것”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고 할 것이다.

다수의 견해가 국회의 자율권을 고려하여 각 법률의 무효확인과 관련해서는 기각을 선고한 이번 결정은, 법원의 재판권을 존중하여 변형결정을 선고한 최근의 야간 옥외집회금지 헌법불합치결정(2009.09.24,2008헌가25)과 마찬가지로 새로운 논쟁의 빌미를 제공하고 있다. 즉 다수의 비판적인 견해들은 헌재의 순수한 법리적 결론이라는 입장에도 불구하고 다분히 정치적인 고려에 치중한 것이라는 주장들이다.

위헌법률심판에서 이미 사실상 위헌으로 결정된 법률을 적용(그것도 형사재판에서)하는 법원과, 다수 재판관들이 인정한 입법절차의 명백한 위법이라는 과정상의 하자를 안고 유효한 결론만 취하고자 하는 국회를 바라보는 국민의 심정은 과연 어떠할 것인가?

다행히 야간옥외집회와 관련해서는 법원이 형사사법에 있어서 헌법불합치의 계속적용이라는 형식적 결론에 얽매이지 않고 헌법정신을 존중하여 최근 무죄판결을 선고한 사례가 나오고 있는 것은 개인적으로 바람직하고 다행스런 일이라고 생각한다.

민주주의에서의 절차적 정당성은 민주적 정당성의 핵심을 이루고 있는 요소이다. 입법절차 위법확인법률의 무효선언이 논란을 없애는 확실한 방법일 것이지만, 헌법재판소의 고충의 결론인 변형결정과 마찬가지로 입법자율성 고려의 헌법정신들을 법원이나 국회가 존중하지 않는다면 헌법기관으로서의 권위는 유지하기 힘들 것이며, 비록 법적 책임으로부터는 회피가능할 수 있을런지는 모르겠으나, 정치적 심판으로부터는 자유롭지 못할 것으로 생각된다.

2009년 10월 21일 수요일

[생각] 대통령 신임투표의 가능성

국민투표에는 크게 본질적으로 그 성격을 달리하는 두가지의 종류가 있다. 그 하나가 국민표결(Referendum)이라고 하는 것으로서 어떤 ‘특정한 사안에 대한 결정’을 하는 것이고, 또 하나는 신임투표(Plebiscite)로서 ‘특정인에 대한 신임’을 묻는 것을 그 내용으로 하는 것이다.

현행 헌법상의 국민투표는 헌법 제72조의 중요정책에 대한 국민투표와 헌법 제130조 제2항의 헌법개정에 관한 국민투표의 두가지로 규정되어 있으며, 모두 ‘국민표결(Referendum)’을 의미하는 것이고, 현행 헌법상 ‘신임투표(Plebiscite)’는 인정되지 않는다고 보는 것이 다수학자의 견해이며 헌법재판소의 태도(2004.05.14,2004헌나1)이다.

노무현대통령의 탄핵과 관련한 위 결정에서 헌법재판소는 “국민투표는 직접민주주의를 실현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사안에 대한 결정’ 즉, 특정한 국가정책이나 법안을 그 대상으로 한다. 따라서 국민투표의 본질상 ‘대표자에 대한 신임’은 국민투표의 대상이 될 수 없으며, 우리 헌법에서 대표자의 선출과 그에 대한 신임은 단지 선거의 형태로써 이루어져야 한다. 대통령이 자신에 대한 재신임을 국민투표의 형태로 묻고자 하는 것은 헌법 제72조에 의하여 부여받은 국민투표부의권을 위헌적으로 행사하는 경우에 해당하는 것으로, 국민투표제도를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강화하기 위한 정치적 도구로 남용해서는 안 된다는 헌법적 의무를 위반한 것이다. 물론, 대통령이 위헌적인 재신임 국민투표를 단지 제안만 하였을 뿐 강행하지는 않았으나, 헌법상 허용되지 않는 재신임 국민투표를 국민들에게 제안한 것은 그 자체로서 헌법 제72조에 반하는 것으로 헌법을 실현하고 수호해야 할 대통령의 의무를 위반한 것이다.”라고 하였던 것이다.

헌법 제72조는 “대통령은 필요하다고 인정할 때에는 외교·국방·통일 기타 국가안위에 관한 중요정책을 국민투표에 붙일 수 있다.”라고 규정하고 있다. 이에 대하여 헌법재판소의 입장과 마찬가지로 신임투표를 인정하는 것은 대의제에 기초한 대통령제에 반하는 것이라는 견해와 국민이 스스로의 정당성을 철회할 수 있는 것이므로 국민주권주의와 민주주의의 일반원리에 근거하여 인정할 수 있다는 견해의 대립이 있다.

문제의 핵심은 헌법 제72조의 성격이 ‘제한적, 한정적’ 규정인지, ‘예시적, 포괄적’규정인지의 성격규명이 우선되어야 할 것이다. 국민투표제도도 일종의 제도보장이라고 본다면 이는 ‘최소한의 보장’에 그치는 것이고, ‘최대한의 보장’을 규정한 것이 아니라고 해석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본다. 즉 동 조항의 성격은 ‘예시적, 포괄적’인 규정이므로 이를 넓게 해석하여 ‘중요정책’에 대통령 자신의 신임까지 결부시켜서 국민의 뜻을 묻는 것도 가능하다고 할 것이다.

전통적인 견해에서 신임투표를 국민투표의 내용에서 배제한 주된 이유는 신임투표가 국민의 뜻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하고, 오히려 집권자의 정당성 확보수단으로 악용된 부정적 경험에 치중하고 있다. 헌법재판소도 위 결정에서 “헌법 제72조는 대통령에게 국민투표의 실시 여부, 시기, 구체적 부의사항, 설문내용 등을 결정할 수 있는 임의적인 국민투표발의권을 독점적으로 부여함으로써, 대통령이 단순히 특정 정책에 대한 국민의 의사를 확인하는 것을 넘어서 자신의 정책에 대한 추가적인 정당성을 확보하거나 정치적 입지를 강화하는 등, 국민투표를 정치적 무기화하고 정치적으로 남용할 수 있는 위험성을 안고 있다. 이러한 점을 고려할 때, 대통령의 부의권을 부여하는 헌법 제72조는 가능하면 대통령에 의한 국민투표의 정치적 남용을 방지할 수 있도록 엄격하고 축소적으로 해석되어야 한다.‘고 함으로써 그 배경을 밝히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현대 정보화사회와 문화국가에서는 국민의 뜻을 확인하는 소통의 방법으로 유용할 뿐만 아니라, 특히 5년 단임제의 제한이 있는 우리의 경우 제도적 악용의 위험도 거의 없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현재 논란이 되고 있는 모든 문제들을 국민투표의 대상으로 하여 대통령의 신임과 결부시킬 수는 없을 것이지만, ‘사안’에 따라 또는 ‘대통령의 결단’에 따라 국민의 의사를 재차 확인할 필요가 있을 정도의 ‘중요정책’이라고 판단되는 사항에 한해서는 스스로의 신임을 연계시키는 것도 현행 제도상으로도 전혀 불가능하지는 않을 것으로 생각한다.

2009년 10월 15일 목요일

[생각] 헌법재판소 변형결정의 효력

헌법재판소의 변형결정에 대하여 그 법적 근거를 명확히 하기 위한 헌법재판소법 개정안 제출과 관련하여 대법원이 반대의 의견서를 제출함에 따라 대법원과 헌법재판소의 해묵은 논쟁이 재연되고 있는 양상이다.

변형결정이라 함은 합헌결정이나 위헌결정 이외의 변형된 형식의 헌법재판소 결정으로서 한정합헌, 한정위헌, 헌법불합치결정 등을 말한다. 이는 위헌결정이 초래할 법적 공백이나 혼란을 최소화하고 가능한 한 입법자의 입법형성권을 존중하기 위한 헌법재판소의 고민의 산물이다.

쟁점이 되고 있는 현행 헌법재판소법 제45조에서 “헌법재판소는 제청된 법률 또는 법률조항의 위헌여부만을 결정한다. 다만, 법률조항의 위헌결정으로 인하여 당해 법률 전부를 시행할 수 없다고 인정될 때에는 그 전부에 대하여 위헌의 결정을 할 수 있다.”고 규정하고 있다.

이를 근거로 대법원은 헌법재판소가 할 수 있는 결정의 형식은 위헌과 합헌결정에 국한되는 것이므로 변형결정의 효력은 법원을 구속하지 않는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으며, 헌법재판소는 이 규정의 의미가 헌법재판소가 구체적인 사건에 있어서의 사실적, 법률적 판단만을 금지하는 것이지, 당해 법률의 위헌심사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며, 위헌결정의 형식은 구체적인 상황에 따라 헌법재판소의 재량으로 결정할 수 있다는 입장이다.

한정위헌결정의 효력과 관련하여서는 1996년 대법원이 구 소득세법 제23조 제4항에 대한 한정위헌결정의 효력을 무시하고 판결한 사안(95누11405)에 대하여 1997년 헌법재판소가 “구체적 사건에서의 법률의 해석ㆍ적용권한은 사법권의 본질적 내용을 이루는 것임이 분명하다. 그러나 법률에 대한 위헌심사는 당연히 당해 법률 또는 법률조항에 대한 해석이 전제되는 것이고, 헌법재판소의 한정위헌의 결정은 단순히 법률을 구체적인 사실관계에 적용함에 있어서 그 법률의 의미와 내용을 밝히는 것이 아니라 법률에 대한 위헌성심사의 결과로서 법률조항이 특정의 적용영역에서 제외되는 부분은 위헌이라는 것을 뜻한다. 따라서 헌법재판소의 한정위헌결정은 결코 법률의 해석에 대한 헌법재판소의 단순한 견해가 아니라, 헌법에 정한 권한에 속하는 법률에 대한 위헌심사의 한 유형인 것이다.”라고 입장을 밝히고 있다.[1997.12.24,96헌마172ㆍ173(병합)]

헌법불합치결정의 효력과 관련하여서는 대법원도 “법률의 위헌 여부의 심판제청은 그 전제가 된 당해 사건에서 위헌으로 결정된 법률조항을 적용받지 않으려는 데에 그 목적이 있고, 헌법 제107조 제1항에도 위헌결정의 효력이 일반적으로는 소급하지 아니하더라도 당해 사건에 한하여는 소급하는 것으로 보아, 위헌으로 결정된 법률 조항의 적용을 배제한 다음 당해 사건을 재판하도록 하려는 취지가 포함되어 있다고 보여질 뿐만 아니라, 만일 제청을 하게 된 당해 사건에 있어서도 소급효를 인정하지 않는다면, 제청 당시 이미 위헌 여부 심판의 전제성을 흠결하여 제청조차 할 수 없다고 해석되어야 하기 때문에, 구체적 규범통제의 실효성을 보장하기 위하여서라도 적어도 당해 사건에 한하여는 위헌결정의 소급효를 인정하여야 한다고 해석되고, 이와 같은 해석은 이 사건에 있어서와 같이 헌법재판소가 실질적으로 위헌결정을 하면서도 그로 인한 법률 조항의 효력상실시기만을 일정기간 뒤로 미루고 있는 경우에도 마찬가지로 적용된다.”고 하고 있다.(대법원 1991.6.11. 선고 90다5450 판결)

헌법재판소법 제45조의 의미는 위헌법률심판에서의 위헌결정의 일반적 내용을 규정한 것이지 위헌결정의 구체적 형식을 정의한 것으로 볼 수는 없으며, 결정의 형식은 법적 안정성과 입법자의 의도 등을 존중하여 헌법재판소가 자율적으로 결정할 수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므로 개정법률로써 권한의 경계를 명확히 하는 것도 의미있는 일일 것이지만, 현행 법률의 해석상으로도 변형결정의 효력은 위헌으로 판단된 범위 내에서는 당연히 법원을 기속하는 것으로 본다.

[생각] 음주측정강제의 위헌성

현행 도로교통법은 제44조 제2항에서 “경찰공무원(자치경찰공무원을 제외한다. 이하 이 항에서 같다)은 교통의 안전과 위험방지를 위하여 필요하다고 인정하거나 제1항의 규정을 위반하여 술에 취한 상태에서 자동차등을 운전하였다고 인정할 만한 상당한 이유가 있는 때에는 운전자가 술에 취하였는지의 여부를 호흡조사에 의하여 측정할 수 있다. 이 경우 운전자는 경찰공무원의 측정에 응하여야 한다.”고 규정하여 일정한 경우에 음주측정을 강제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이에 대해서는 헌법상 불리한 진술의 강요금지를 내용으로 하는 진술거부권의 문제, 강제처분에 대한 영장주의의 문제, 형사처벌을 위한 적법절차의 문제, 그리고 음주측정의 강제가 개인의 양심을 제한하는 것인가의 문제와 헌법상의 행복추구권에서 유래하는 개인의 일반적행동자유권을 침해하는가의 문제 등이 있다.

헌법재판소는 1997.03.27, 96헌가11결정에서 주취운전의 혐의자에게 호흡측정기에 의한 주취여부의 측정에 응할 것을 요구하고 이에 불응할 경우 처벌한다고 하여도 음주측정은 호흡측정기에 입을 대고 호흡을 불어 넣음으로써 身體의 物理的, 事實的 상태를 그대로 드러내는 행위에 불과하므로 이를 두고 “진술”이라 할 수 없어 형사상 불리한 “진술”을 강요하는 것에 해당한다고 할 수 없으므로 헌법 제12조 제2항의 진술거부권조항에 위배되지 아니한다고 하였다.

또한, 영장주의와 관련해서는 음주측정은 성질상 강제될 수 있는 것이 아니며 궁극적으로 당사자의 자발적 협조가 필수적인 것이므로 法官의 令狀을 필요로 하는 强制處分이라 할 수 없어 영장주의에도 위배되지 아니하며, 추구하는 목적의 중대성(음주운전 규제의 절실성), 음주측정의 불가피성(주취운전에 대한 증거확보의 유일한 방법), 국민에게 부과되는 부담의 정도(경미한 부담, 간편한 실시), 음주측정의 정확성문제에 대한 제도적 보완(血液採取 등의 방법에 의한 再測定 보장), 처벌의 요건과 처벌의 정도(測定不應罪의 행위주체를 엄격히 제한) 등에 비추어 合理性과 正當性을 갖추고 있으므로 헌법 제12조 제1항의 적법절차원칙에 위배된다고도 할 수 없다고 한다.

그리고 음주측정요구에 처하여 이에 응하여야 할 것인지 거부해야 할 것인지 고민에 빠질 수는 있겠으나 그러한 고민은 선과 악의 범주에 관한 진지한 윤리적 결정을 위한 고민이라 할 수 없으므로 양심의 자유를 침해하는 것이라고 할 수 없으며, 입법목적의 중대성, 음주측정의 불가피성, 국민에게 부과되는 부담의 정도, 처벌의 요건과 정도에 비추어 과잉금지의 원칙에 어긋나는 것이라고 할 수 없으므로, 일반적 행동의 자유를 침해하는 것이라고도 할 수 없어 합헌이라고 하였다.

헌법재판소의 위와 같은 입장과 마찬가지로 주취운전은 개인의 생명, 신체에 대한 문제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타인의 생명과 신체, 재산에 미치는 영향이 예상하기 힘들 정도로 중대한 사안이므로 음주측정거부자에 대하여 주취운전자와 동일한 형으로 처벌하는 것 또한 헌법상 비례의 원칙에 비추어 보아도 합리적인 범위 내의 것으로서 합헌적이라고 생각한다.

2009년 10월 14일 수요일

[생각] 성범죄자의 신상공개와 전자발찌제도의 위헌성

최근 아동을 상대로 한 성폭력사건의 심각성에 맞추어 범죄자에 대한 강력한 처벌의 요구가 봇물을 이루고 있다. 청소년대상 성범죄자의 신상공개에 대해 규정하고 있는 ‘청소년의 성보호에 관한 법률’에 대해서는 이미 헌법재판소가 2003. 6. 26, 2002헌가14결정에서 재판관 4:5의 결정으로 합헌으로 판단한 바 있다. 즉 합헌의견보다 위헌의견이 많았음에도 위헌정족수인 6인에 미달하여 합헌으로 선고된 것이다.

이 결정에서 주된 쟁점은 성범죄자로부터 아동을 보호하기 위한 공익을 중시할 것인가와 범죄인 개인의 인권을 중시할 것인가의 대립으로 단순화 시켜 본다면, 4인의 합헌의견은 공익의 입장에서 사회를 보호하기 위한 선택을, 5인의 위헌의견은 현대판 ‘주홍글씨’의 수치형으로써 범죄자의 인격권을 과도하게 침해한다고 하였던 것이다.

또한 5인의 위헌의견은 청소년 성매매의 폐습을 치유함에 있어서는, 형벌이나 신상공개와 같은 처벌 일변도가 아니라, 성범죄자의 치료나 효율적 감시, 청소년에 대한 선도, 기타 청소년 유해환경을 개선하기 위한 정책 추진과 같은 다양한 수단들을 종합적으로 활용하는 것과 같은 근본적인 예방책에 치중하는 것이 더 바람직할 것이라고 하였다.

나아가 5인의 위헌의견은 청소년에게 성매수행위의 상대방이 되도록 유인ㆍ권유한 자(법 제6조 제4항) 등은 모두 청소년 성매매를 유발ㆍ조장하는 범죄자들로서, 청소년 성매수자보다 더 무거운 법정형이 예정되어 있는 데도 불구하고 신상공개는 되지 않는 점에서 청소년 성매수자만 차별하여 신상공개를 하는 것은 그 차별의 이유와 차별의 내용 사이의 적절한 균형관계를 인정할 수 없으므로 평등원칙에 위배된다고 한다.

신상공개제도는 상습적이고 재범가능성이 높은 청소년상대 성범죄자로부터 사회를 보호하기 위한 불가피한 선택인 측면이 있으며, 그것을 형벌의 일종인 현대판 ‘주홍글씨’의 수치형으로써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 다만 청소년 성매수자 뿐만 아니라 유인, 권유자에 대해서도 동일하게 신상공개의 대상이 되도록 함으로써 불평등의 문제를 시정할 필요는 있어 보인다.

전자팔찌 또는 전자발찌(electronic tagging)는 위치추적 전자장치 등 을 이용하여 팔찌나 발찌 착용자의 위치나 상태를 감시하는 장치를 말하는 것으로서 ‘특정 성폭력 범죄자에 대한 위치추적 전자장치 부착에 관한 법률(제정 2007.4.27 법률 제8394호)’이 2007년 4월 27일 공포됨으로써 2008년 9월 1일부터 시행되고 있는 제도이다.

이에 대해서는 아직 헌법재판소의 결정례가 없어 견해의 대립이 있을 수 있지만, 일단 전자발찌 등의 전자장치의 부착은 과거의 범죄행위에 대한 응보가 아니라 재차 발생할지도 모르는 상습적인 성폭력 범죄자의 재범을 예방하기 위한 것이므로 이중처벌에는 해당하지 않으며, 최근의 성범죄의 급증현상과 재범의 확대 등으로 비추어 입법목적의 정당성과 수단의 적합성은 인정할 수 있을 것이다.

다만, 구체적인 집행에 있어서는 불필요하게 과도한 장기의 부착은 범죄자의 인격권을 지나치게 침해할 소지가 있으므로 보다 덜 침해적인 방법은 없는 것인지, 그리고 전자발찌 등의 부착의 효과가 당초의 입법목적대로 범죄예방의 효과에 얼마나 기여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좀 더 신중한 분석과 접근이 필요한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이 법의 입법목적이 특정 범죄자의 재범 방지와 성행(性行)교정을 통한 재사회화를 위하여 그의 행적을 추적하여 위치를 확인할 수 있는 전자장치를 신체에 부착하게 하는 부가적인 조치를 취함으로써 특정범죄로부터 국민을 보호하기 위한 것이고, 법원은 검사의 부착명령 청구가 이유 있다고 인정하는 때에는 10년의 범위 내에서 부착기간을 정하여 판결로 부착명령을 선고하도록 하고 있으므로 헌법상 비례의 원칙에도 충실한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청소년의 성보호에 관한 법률’에 따른 신상공개제도와 ‘특정 성폭력 범죄자에 대한 위치추적 전자장치 부착에 관한 법에 근거한 전자발찌 등의 제도는 모두 급증하는 성범죄와 범죄행태의 흉포화 현상에 상응하여 구체적인 특정한 범죄에 한하여 상대적으로 사회적 약자인 여성과 청소년, 아동을 보호하기 위한 불가피한 선택인 한, 모두 합헌적인 것으로 판단된다.

2009년 10월 11일 일요일

[생각] 가산점제도의 위헌성

가산점제도란, 일정한 취업보호실시기관이 채용시험을 실시할 경우 국가유공자, 제대군인 등이 그 채용시험에 응시한 때에는 일정한 가산점을 부여하는 제도를 말한다. 제대군인 가산점의 경우는 1999년 12월 23일 위헌결정을 받아 이미 효력을 상실하였고(98헌마363), 국가유공자 가산점의 경우도 2006년 2월 23일 헌법불합치결정으로 2007년 6월 30일을 시한으로 개선입법을 조건으로 계속 적용되었었다.(2004헌마675)

헌법재판소 전원일치의 의견으로 위헌결정을 선고 받은 제대군인에 대한 가산점제도에 대하여 병무청이 10월 9일 국회 국방위원회 국정감사 업무보고에서 ‘병역의무 이행자가 우대받는 사회 풍토 조성을 위해 군필자에 대해 정부기관·공사단체 채용 때 가산점을 부여하는 병역법 개정을 추진하겠다’고 밝힘으로써 다시금 논란이 되고 있다.

논란의 핵심은 무엇보다 남성과 여성, 남성 중에서도 현역복무나 상근예비역 소집근무를 할 수 있는 신체건장한 남자와 그렇지 못한 남자, 즉 병역면제자와 보충역복무를 하게 되는 자를 차별하는 것이라는 점에 초점이 맞춰지고 있다. 더불어 직업의 자유와 관련한 공무담임권의 제한문제, 직업공무원제도의 본질적 내용의 침해여부 등도 아울러 검토되어야 할 쟁점들이다.

먼저, 직업의 자유 중 직업결정(선택)의 자유에 대하여 특별한 관계에 있는 공무담임권의 제한과 관련해서는 능력주의의 핵심적 내용인 공무수행능력과는 상관없는 단순한 병역의무이행여부를 기준으로 여성과 병역면제자 등의 공직취임권을 박탈하는 것이 헌법상 과잉금지원칙(비례의 원칙)에 부합할 것인가의 문제가 있다.

제대군인가산점제도는 군 복무를 한 남성이 종래 우리 사회에서 차별을 받아 온 집단이 아니고, 주로 헌법에서 특별히 평등을 요구하고 있음에도 차별적 취급으로 인하여 관련 기본권에 중대한 제한을 초래하게 되는 여성과 병역면제자, 제한적 복무자(보충역)를 차별하는 제도이므로 차별취급을 위해서는 역시 엄격한 심사기준인 비례의 원칙에 적용되어야 한다.

직업공무원제도의 보장과 관련해서는 비록 제대군인가산점제도가 승진이나 봉급 등의 공직 내부에서의 차별이 아니라 공직에의 진입자체를 어렵게 함으로써 여성과 제대군인이 아닌 남성으로부터 직업선택(공직취임)의 기회를 원천적으로 박탈하기는 하지만, 이를 완전히 배제하고 있는 것은 아니어서 직업공무원제도의 보장으로서의 최소보장의 원칙에는 반하지 않는 것으로 일반적으로 이해한다.

헌법재판소는 “제대군인 가산점제도는 아무런 재정적 뒷받침없이 제대군인을 지원하려 한 나머지 결과적으로 여성과 장애인 등 이른바 사회적 약자들의 희생을 초래하고 있으며, 각종 국제협약, 실질적 평등 및 사회적 법치국가를 표방하고 있는 우리 헌법과 이를 구체화하고 있는 전체 법체계 등에 비추어 우리 법체계 내에 확고히 정립된 기본질서라고 할 ‘여성과 장애인에 대한 차별금지와 보호’에도 저촉되므로 정책수단으로서의 적합성과 합리성을 상실한 것”이라고 하고 있다.

국가유공자에 대한 가산점제도에 대한 헌법불합치결정에 대하여는 그 후 개정된 ‘국가유공자 등 예우 및 지원에 관한 법률’은 국가유공자·애국지사 본인, 전몰·순직 군경, 순직공무원의 유족에게는 10%의 혜택을 주지만 해당 가족과 전몰·순직 유자녀의 자녀 중 한 명 등은 5%를 주는 것으로 조정했다. 그 동안은 국가유공자 본인 뿐만 아니라 그 가족까지도 일률적으로 10% 가산점을 적용해 왔던 것이다.

최근의 국정감사 답변과 관련하여 병무청의 제대군인에 대한 가산점제도 도입을 위한 개선입법의 입장도 국가유공자에 대한 가산점제도에서와 같이 제도 그 자체의 입법목적은 정당하므로 위헌이 아니지만, 3~5%에 이르는 가산점의 범위가 지나치게 높아 위헌적인 것이므로 이를 적정한 수준으로 조정하여 합헌적인 것으로 해석함으로써 가산점제도의 부활을 도모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문제는 이러한 가산점제도가 승진이나 봉급 등의 공직 내부에서의 차별이 아니라 공직에의 진입자체를 어렵게 한다는 데 있다. 또한 제대군인에 대한 가산점은 우선적 근로기회의 제공 등에 대한 헌법 제32조 제6항의 근거를 두고 있는 국가유공자에 대한 가산점과는 달리 헌법적 근거가 취약하다는 문제점을 안고 있다. 또한 개정된 ‘국가유공자 등 예우 및 지원에 관한 법률’상의 5~10% 혜택도 개인적으로는 지나치게 과도한 느낌이 있다.

헌법적 근거가 취약한 가산점제도가 아니라도 승진이나 봉급 등의 공직 내부에서의 혜택부여나 일정한 '사회적응자금' 명목의 지원금이나, 이미 검토 중인 것으로 알려진 현행법상 별도의 연금 보험료 납부 없이 6개월간의 가입 기간을 인정해 주던 것을 복무 기간 전체인 2년으로 늘려 인정하도록 국민연금법을 개정하는 방안 등도 고려해 볼 수 있을 것이다.

국가유공자의 예우를 반대할 사람은 별로 많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본인이 아닌 가족에 대한 과도한 가산점문제는 이견이 있을 수 있다고 본다. 굳이 공직시험에서의 가산점이 아니더라도 기존의 보훈급여금의 대상과 금액을 늘리는 방안, 기타 취업지원, 교육지원, 대부지원, 의료지원, 양로지원, 양육지원 등 그 밖의 지원 방법 등을 보다 더 확대하는 대책도 충분히 고려할 수 있다.

공직시험에 있어서의 가산점 문제는 공정한 출발의 문제이다. 출발의 불공정성은 의도하지 않은 사회적 신분의 창출로서 새로운 갈등의 씨앗이 될 수도 있다. 더군다나 경제위기의 상황과 맞불려 오늘날의 위험사회에서 상대적으로 안전한 공직으로의 선호가 몰리고 있고, 1%미만의 점수로 당락이 결정되는 현실에서는 2%이상의 가산점부여는 헌법상 평등의 원칙에도 중대한 위협이 되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헌법재판소의 입장도 제대군인에 대한 가산점과 관련해서는 가산점제도가 정책수단으로서의 적합성과 합리성을 상실한 것이라고 했다가, 국가유공자에 대한 가산점에 대해서는 다수의견이 정책수단으로서의 적합성을 인정하면서 목적과 수단간의 비례성을 충족하지 못하여 평등권을 침해하는 것이라고 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예외적으로 가산점제도를 인정하더라도 가능한한 평등의 원칙에 어긋나지 않도록 주의깊은 합의가 필요한 시점이다.



2009년 10월 9일 금요일

[생각] 오바마의 버려진 개를 말하다. 9 - 희망에의 기대

올해 2009년 노벨평화상 수상자가 버락 오바마 현 미국 대통령으로 결정되었다고 한다. 현지 노르웨이 오슬로의 발표회장의 소식을 전하는 기자들을 중심으로 한 참석자들 뿐만 아니라 미국 현지의 언론들도 의외라는 듯한 다소 놀라운 반응들을 전하고 있다.

논의의 과정은 만장일치였으며, 현재까지의 업적보다는 앞으로의 세계평화와 군축, 그리고 핵없는 세상에로의 기여에 대한 기대감의 표시로 분석하는 분위기가 대세인 듯 하다. 냉전이후 세계의 패권을 장악한 국가인 미국의 현직 대통령이 수상자로 결정된 이면의 술렁임은 한편으로는 당연한 일이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미국의 현직 대통령으로서는 러일 전쟁에서 평화 조약을 이끌어낸 공로로 1906년 수상한 시어도어 루스벨트, 국제연맹을 창설한 공로로 1919년 수상한 우드로 윌슨에 이어 세 번째 수상자이며, 비록 짧은 재임기간이긴 하지만 평화를 위해 인종과 종교의 벽을 넘나든 그의 행보를 보면 그리 새삼스러울 것도 없는 일이기도 하다.

다만, 최근 올림픽유치와 관련하여 오바마의 발로 뛰는 전방위적 노력에도 불구하고 브라질에 예상 밖의 일격을 당하면서 다소 위축된 오바마의 입장에서는 금융위기 이후의 여러 가지 정책의 수행과 건강보험개혁 등 국내의 복잡한 여론 동향과 관련하여서는 상당한 힘을 얻을 것으로 보인다.

더군다나 미국의 보수언론을 중심으로 노골적인 기득권수호투쟁 모드에 돌입한 이른바 우파의 입장에서는 그들이 사회주의라고 까지 몰아붙이고 있는 ‘오바마의 가치’가 이번 수상을 계기로 어떤 형식으로든지 힘을 얻는 것은 바라지 않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선수를 쳐서 오히려 수상의 의미를 미리 깎아 내리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노벨위원회의 공식적인 입장 중에는 미국 최초의 흑인대통령이라는 상징적인 존재에의 희망과 냉전이후 미국중심의 단일패권주의로 향하는 미국의 탐욕의 질주에 어느 정도의 제동장치로서 ‘약간의 전환’에로의 기대심리를 분명히 싣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미 노르웨이를 포함한 유럽은 리스본 조약을 통하여 대통령직과 임기 5년의 외교대표직을 신설하는 등 EU의 정치 통합을 위하여 달려가고 있으며, 아일랜드에 이어 폴란드까지 비준에 동의함으로써 현재까지 체코를 제외한 27개국의 비준을 마치게 됨으로써 조만간 거대한 공동체의 출범을 앞두고 있다.

따라서 냉전이후 미국의 패권주의와 금융위기로 인한 단일패권주의에 대한 견제의 요구 등으로 세계는 지금 새로운 가치 질서를 향하여 암중모색 중에 있다. 더군다나 우리나라를 포함하여 새로운 개발도상국의 입지가 강화되고, 특히 중국을 중심으로 새롭게 재편되는 헤게모니에서 유럽의 입지를 위한 간접적인 호의의 포석으로도 볼 수 있을 것이다.

여하튼 모든 이유를 떠나서 개인적으로는 지금 진행하고 있는 미국내에서의 좀 더 ‘사람사는 세상’을 향한 ‘오바마의 가치’를 존중하며, 그의 개혁 조치들이 가시적인 성과를 내기를 기대한다. 비록 반대에 부닥쳐서 약간의 왜곡이 있더라도 본질적인 내용에 있어서는 빛바램없이 ‘담대한 진보’가 ‘세계의 희망’이라는 바다에 도달할 수 있기를 기대한다.

물론 그가 대한민국의 대통령이 아니고 미국의 대통령이므로 철저히 ‘미국의 가치’를 존중하는 범위 내에 머물 것이며, ‘미국의 가치’가 ‘거대한 전환’을 가져온다 한들 우리의 이해관계와 충돌하는 부분은 어쩔 수 없는 새로운 도전이 될 것이다. 그렇더라도 ‘평화와 연대’에의 쉼없는 행진은 굴절없이 계속되기를 희망한다.

2009년 10월 8일 목요일

[생각] 원인에 있어서 자유로운 행위

여기 저기서 성폭력범에 대한 분노한 성토들이 일고 있다. 아직 자신의 의사표현에도 미숙한 어린 아동에 대한 성폭행뿐만 아니라, 보호의무자인 아버지의 친딸에 대한 성폭행에 이르기까지 인륜의 구분도 없이 전방위적으로 연속하여 발생하고 있어 사람들의 분노도 극에 달한 듯 싶다.

일명 피해자의 이름(가명으로 알고 있음)인 ‘나영이사건’으로 세간에 불리던 것이 피해자의 인권보호차원에서 가해자의 이름인 일명 ‘조두순사건’으로 통일하여 광고라도 하듯이 연일 언론을 장식하고 있다. 피해자의 인권을 거론하며 이 사건과 무관한 본명이 진짜 ‘조두순’인 일반 사람(同名異人)들의 인권은 전혀 아랑곳없다. 인권의 이름으로 인권을 침해하는 모순, 더불어 개명신청도 좀 늘어날 것이리라.

이런 사건들의 원인들로는 사회적인 병리현상도 그 한 축을 이루고 있을 것이지만, 무엇보다 사람들의 분노는 범죄인 개인의 반규범적 행태를 성토하면서도, 나아가 범죄인들의 성범죄행위의 원인이 음주로 인한 심신미약의 상태에서 이루어졌음에도 형을 오히려 감경받은데 따른 법원의 태도에 더 민감한 듯하다.

형법적으로는 범죄행위의 결과가 그러한 심신미약의 상태에서 행해진 경우에는 형을 필요적으로 반드시 감경하도록 하고 있다.(형법 제10조 제2항) 이러한 한정책임능력자인 심신장애의 인정여부에 대해서는 법원이 여러 사정을 종합하여 판단할 수 있도록 함으로써 광범위한 판단의 여지가 있어 더욱 비난을 피하기 어려운 입장으로 보인다.

더군다나 위험의 발생을 예견하고 자의로 심신장애를 야기한 자의 행위에 대해서는 이른바 ‘원인에 있어서 자유로운 행위’라 하여 형법이 명시적으로 형의 감경을 배제하고 있음(형법 제10조 제3항)에도 불구하고, 최근의 사건 등에서 법원은 양형판단에서 나름대로의 감경의 사유로 고려한 점이 일반 국민의 법감정과의 괴리를 더욱 크게 한 탓일 것이다.

일명 ‘조두순사건’에서는 검찰의 불항소로 인한 불이익변경금지로 인한 대법원에서의 형의 확정에로의 귀결의 불가피성이, ‘친딸사건’에서는 혈연관계와 부양의무 등이 현실적인 판단의 근거로 고려된 듯 하나, 국민의 감정으로는 보다 강력한 현실적 처벌의 수위를 요구하는 듯 하다.

응보적 엄벌주의가 최선의 방책은 아니다. 죄를 지은 사람이 죄값을 받는 것은 당연한 일일 것이나, 과도한 엄벌주의와 이른바 ‘화학적 거세’ 등의 신체적 방법이 제도화된다면, 만의 하나 혐의가 불완전한 사람도 그러한 제도의 희생양이 될 수도 있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제도가 공정한 신뢰를 바탕으로 하지 않는 경우에는 또 하나의 폭력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화학적 거세’ 등의 신체적 야만은 인륜을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또 하나의 반인륜을 제도화하는 것이다. 오늘의 문화국가에서 비록 ‘반인륜적 범죄’라 하더라도 가능한한 ‘인륜적 대책’(공소시효배제, 치료감호의 적극적 확대 등)을 모색해야 한다. ‘강제적 거세’는 당연히 배격되어야 하며, 동의를 전제로 한 ‘자발적 거세’라도 남용과 오판의 우려가 있으므로 그러한 ‘야만적 신체형’은 제도화되어서는 안된다.

피해자의 입장이 되지 않고서는 응보적 감정을 쉽게 무마하기 힘든 고통이라는 사실을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비록 현재로서는 개선불가능한 듯이 보일지라도 개선의 희망을 버리지 말고 그들을 평생을 걸쳐서라도 치료하고 교정시키는 방법을 고민하는 것이 더 바람직한 인륜적인 대책이 아니겠는가. ‘보복과 격리’의 대상이 아니라 ‘보호와 치료’의 대상임을 강조하는 것이 보다 ‘사람사는 세상’다운 일이 아니겠는가 싶다.

사랑과 용서의 힘이 죄를 지은 인간에게는 무엇보다 강력한 형벌로 느낄 수 있는 사람으로 키워내는 일, 그것이 ‘사람사는 세상’에서 살아있는 사람들에게 주어진 ‘사람으로서의 특권’일지도 모르겠다. 사람들에게서 기대하기 힘든 일이라 가끔씩 종교적 절대자의 힘을 갈구하기도 하는 것이기도 할 것이다. 사람에게서만 다 찾을 수 있다면 천국이 따로 있을 이유도 없을 것이리라. 그래도 찾아나서야 하지 않겠는가.

2009년 10월 2일 금요일

[생각] 인간의 본성과 보편적 가치

세상이 나영이 사건으로 떠들썩하다. 9세의 아동에게 50대의 성인 남자가 저지른 만행은 대부분 언론의 일치된 지적대로 ‘짐승의 행위’에 다름아니다. 반인륜적 범죄행위에 대한 인간의 존엄성, 특히 아동의 생명과 신체의 보호라는 보편적 가치에 대한 공분을 보면서 뒤늦게나마 인간의 본성에 대한 잊혀지지않은 성찰들을 발견하게 되어 다행이라는 느낌도 있다.

비록 현행 형사소송법상의 불이익변경금지의 원칙에 따라 검찰의 불항소로 1심의 징역 12년형이 선고형으로 확정되어 국민의 법감정을 거스리게 되자, 가석방을 배제한 형의 엄격한 집행약속으로 성난 여론을 무마하고 있는 형국이지만, 새로운 합의를 도출하지 않고서 현행 제도상으로는 불가피한 결론이기도 하다.

이번 사건을 통해서도 개인적으로는 본질적으로 인간의 본성, 그 바닥에 분명 ‘짐승의 본성’이 숨어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인간이 짐승과 달리 인간으로서 존엄한 이유는 그 뿐만 아니라 그와 같은 ‘짐승의 본성’을 길들일 수 있는 성찰하는 ‘인식’과 ‘의사’, 그리고 그에 따른 책임있는 ‘행동’까지 ‘학습할 수 있는 본성’까지도 갖추고 있기 때문이리라.

불의 이용과 도구의 사용보다도 언어의 학습이 인류의 발전에 획기적인 기여를 하게 된 것도 언어를 통하여 끊임없이 스스로를 되돌아 보고 오류를 수정하면서 개인적 욕망을 제어하는 ‘감성의 양육’과정을 오랜 시간을 통하여 전수함으로써 오늘날까지 인류가 문화적 존재로서 세상을 이른바 문명이라는 이름으로 지배할 수 있었던 이유가 아닐까.

물론 동일한 사실과 현상에 대해서는 개인적인 가치관에 따른 구체적인 반응으로서의 인식과 의사, 그리고 행동에는 차이가 있을 수 있을 것이다. 이번 나영이사건에 비추어 보더라도 그만한 형벌이면 족하다는 의견과 더욱 엄한 형을 선고하여야 한다는 견해의 대립이 있는 것도 그 한 예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형사적 처벌은 사후적 구제책에 불과한 것이다. 즉 사건이 발생하고 난 후에 일종의 응보적, 또는 교화적 필요에 의해서 비로소 선언되는 미봉책에 다름아닌 것이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일들이 다시 반복해서 일어나지 않도록 사전에 미리 예방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러면 도대체 무엇으로써 끊임없이 반복되는 이러한 야만들을 물리칠 수 있을 것인가.

인간이 짐승과는 달리 ‘경쟁적인 생래적 본성’이외에도 ‘연대적인 양육된 본성’까지도 아울러 가진 존재라 한다면 ‘양육된 본성’이 ‘생래적 본성’인 ‘욕망의 질주’를 제어할 수 있는 합리적인 사회적 기준들을 꾸준히 합의하면서 교육하고 실천하는 일이 중요할 것이다. 경쟁도 중요하지만 타인을 존중하는 ‘공존과 상생을 위한 경쟁’으로 학습되어야 하는 이유이다.

‘생각하는 존재로서의 인간의 위대성’은 비록 개인적, 개별적 가치에는 배치되더라도 ‘보편적 가치에 대한 존중과 배려심’에 있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그러한 보편적 가치가 다수의 대중들에게 흐르는 강물처럼 자연스럽게 스며들기 위해서는 ‘가치’라는 것들이 무엇보다 ‘소통에 따른 참여의 결과물’들이어야 할 것이다.

‘강요된 약속’이 아니라 자발적인 ‘참여의 약속’만이 존경받는 권위로서의 효력을 지닐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자신의 속에 내재된 두 가지의 본성 중에서 어느 것으로써 각자의 인격을 규정할 것인가의 개인적인 선택도 사회적 가치의 흐름으로부터 결코 자유로울 수는 없으므로 개인의 범죄는 일차적으로는 범죄행위를 선택한 범죄자 개인의 책임이겠지만, 어느 정도는 사회의 책임이기도 하다.

먹고 살기위해 넋을 놓고 달리는 사이, 이전의 혜진, 예슬을 포함하여 나영이에 이르기까지 무고한 아이들의 희생들이 잇따르고 있다. 안타까운 아이들의 피해의 그늘에 또 다른 유린되고 납치된 소중한 생명과 가치들이 가려져 있지는 않은지. 먹고 사는 문제에 지나치게 치우친 나머지 삶의 본질들로부터 너무 멀어진 것은 아닌지, 치유가 불가능한 범죄자를 양산하는 사회의 치유는 어떻게 얼마나 가능할 것인지 고민할 때다.

종교라는 이름의 성스러운 장소조차 더 이상 범죄의 현장이 되고 마는 현실, 존경받고 존경할 수 있는 개인들이 하나 둘씩 사라져가고 있는 오늘의 사회, 또 다른 허위의식들 속에서 잠시 방심하고 있는 이 순간에도 소리없이 잊혀지고 있는, 힘없이 폭력에 묻혀가면서도 침묵할 수 밖에 없는 생명과 가치들은 없는지 되돌아 볼 때다.

하나의 공동체를 구성하는 개인과 사회와 국가는 결코 모두 범죄와 범죄자로부터 완전히 자유롭지는 못할 것이므로 비록 치유가 불가능해 보일지라도 치유하기를 포기해서는 안될 것이다. 반인륜적, 반사회적, 반국가적 범죄를 통제하기 위해 개인과 사회와 국가는 또 얼마나 엄격하고 공정하게 스스로를 재단해왔는지도 돌아보아야 한다.

범죄자에 대해서는 당연히 그에 상응하는 형벌이 내려져야 할 것이지만, 최소한 끊임없이 반복되는 반인륜의 악순환의 고리를 끊어내기 위한 근원적인 해결책도 모색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형벌로서의 사형과 무기징역이 개인적 응보의 감정에는 충실할지 모르겠지만 사회적 방위의 효과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보다 더 근본적이고 조화로운 해결책은 무엇보다 구성원 각자의 내면에 숨어 있는 조급하고 이기적인 ‘경쟁적 본성’들을, 보다 더 조화롭게 타인의 생명과 권리 그리고 합의된 보편적 가치들을 존중하는 ‘연대적 본성’으로의 합리적인 ‘감성의 양육’을 강조하는 것도 한 방법일 것이다. 비록 느리더라도 꾸준한 공감을 유도하는 노력으로 믿음의 뿌리를 내릴 때 사회는 더 강해질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