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10월 30일 금요일

[생각] 입법절차의 위법과 그 법률의 효력

이른바 미디어관련법(신문 등의 자유와 기능보장에 관한 법률, 방송법, 인터넷멀티미디어 방송사업법 등)의 처리과정상의 논란과 관련한 헌법재판소의 결정(2009.10.29,2009헌라8)이 있었다. 헌재의 결론을 요약하면 ‘절차는 위법’하지만, 국회의 입법자율권을 존중하여 그 법률들의 ‘효력은 유효’하다는 것으로 정리할 수 있을 것이다.

주로 입법과정상의 절차에 주목한 이번 결정에서는 신문법과 관련하여 재판관 이강국, 조대현, 김희옥, 송두환의 위법의견이 밝히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국회의 심의절차는 표결절차와 마찬가지로 국회에 의한 의사결정에서 생략할 수 없는 핵심절차로서, 의회주의 이념을 기초로 하는 국회 입법절차의 본질적인 부분이므로 국회법 제93조는 심의절차를 특별한 사유가 없는 한 반드시 거쳐야 할 절차로 규정하고, 특히 위원회의 심사를 거치지 아니한 안건에 대하여는 본회의의 의결에 의하여도 질의․토론 절차를 생략할 수 없도록 함으로써 안건에 관한 심의가 보장되도록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 사건에서는 신문법 수정안에 대한 질의· 토론신청을 할 수 있는 기회를 사전에 부여하였다고 볼 수 없으므로, 질의ㆍ토론절차를 생략한 피청구인의 의사진행은 국회법 제93조 단서에 명백하게 위반된다.”고 하였다.

또한 표결절차의 위법과 관련하여 재판관 이강국, 이공현, 조대현, 김희옥, 송두환의 위법의견이 밝히고 있는 바와 같이 “헌법 제49조가 천명한 다수결의 원칙은 국회의 의사결정 과정의 합리성 내지 정당성이 확보될 것을 전제로 한 것이므로, 법률안에 대한 표결절차가 자유와 공정이 현저히 저해된 상태에서 이루어져 표결결과의 정당성에 영향을 미칠 개연성이 인정되는 경우라면, 그러한 표결절차는 헌법 제49조 및 국회법 제109조가 규정한 다수결 원칙의 대전제에 반하는 것으로서 국회의원의 법률안 표결권을 침해”하는 것이다.

방송법과 관련하여 재판관 조대현, 송두환의 위법의견이 명백히 하고 있는 바와 같이 “질의와 토론의 기회를 실질적으로 부여하는 것은 의회민주주의 원리 등에서 도출되는 법률안 심의․표결권의 본질적 내용을 구성하므로, 질의․토론을 임의로 생략할 권한이 없는 피청구인이 장내소란을 이유로 질의․토론을 실시하지 않겠다고 공언한 것은 그 발언의 효력 유무와는 무관하게 질의와 토론을 사실상 불가능하게 할 수 있는 것으로서 피청구인의 자율적 의사진행 권한의 한계를 넘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따라서 각 법률의 무효확인청구에 대한 판단에서 재판관 조대현, 송두환의 인용의견이 언급하고 있는 바와 같이 “법률안에 대한 국회의 의결이 국회의원들의 심의‧표결권한을 침해한 경우, 그러한 권한침해행위를 제거하기 위하여는 권한침해행위들이 집약된 결과로 이루어진 가결선포행위의 무효를 확인하거나 취소”하여야 하며, 이러한 “가결선포행위의 심의·표결권한 침해를 확인하면서, 그 위헌성․위법성을 시정하는 문제는 국회의 자율에 맡기는 것은, 모든 국가작용이 헌법질서에 맞추어 행사되도록 통제하여야 하는 헌법재판소의 사명을 포기하는 것”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고 할 것이다.

다수의 견해가 국회의 자율권을 고려하여 각 법률의 무효확인과 관련해서는 기각을 선고한 이번 결정은, 법원의 재판권을 존중하여 변형결정을 선고한 최근의 야간 옥외집회금지 헌법불합치결정(2009.09.24,2008헌가25)과 마찬가지로 새로운 논쟁의 빌미를 제공하고 있다. 즉 다수의 비판적인 견해들은 헌재의 순수한 법리적 결론이라는 입장에도 불구하고 다분히 정치적인 고려에 치중한 것이라는 주장들이다.

위헌법률심판에서 이미 사실상 위헌으로 결정된 법률을 적용(그것도 형사재판에서)하는 법원과, 다수 재판관들이 인정한 입법절차의 명백한 위법이라는 과정상의 하자를 안고 유효한 결론만 취하고자 하는 국회를 바라보는 국민의 심정은 과연 어떠할 것인가?

다행히 야간옥외집회와 관련해서는 법원이 형사사법에 있어서 헌법불합치의 계속적용이라는 형식적 결론에 얽매이지 않고 헌법정신을 존중하여 최근 무죄판결을 선고한 사례가 나오고 있는 것은 개인적으로 바람직하고 다행스런 일이라고 생각한다.

민주주의에서의 절차적 정당성은 민주적 정당성의 핵심을 이루고 있는 요소이다. 입법절차 위법확인법률의 무효선언이 논란을 없애는 확실한 방법일 것이지만, 헌법재판소의 고충의 결론인 변형결정과 마찬가지로 입법자율성 고려의 헌법정신들을 법원이나 국회가 존중하지 않는다면 헌법기관으로서의 권위는 유지하기 힘들 것이며, 비록 법적 책임으로부터는 회피가능할 수 있을런지는 모르겠으나, 정치적 심판으로부터는 자유롭지 못할 것으로 생각된다.

2009년 10월 21일 수요일

[생각] 대통령 신임투표의 가능성

국민투표에는 크게 본질적으로 그 성격을 달리하는 두가지의 종류가 있다. 그 하나가 국민표결(Referendum)이라고 하는 것으로서 어떤 ‘특정한 사안에 대한 결정’을 하는 것이고, 또 하나는 신임투표(Plebiscite)로서 ‘특정인에 대한 신임’을 묻는 것을 그 내용으로 하는 것이다.

현행 헌법상의 국민투표는 헌법 제72조의 중요정책에 대한 국민투표와 헌법 제130조 제2항의 헌법개정에 관한 국민투표의 두가지로 규정되어 있으며, 모두 ‘국민표결(Referendum)’을 의미하는 것이고, 현행 헌법상 ‘신임투표(Plebiscite)’는 인정되지 않는다고 보는 것이 다수학자의 견해이며 헌법재판소의 태도(2004.05.14,2004헌나1)이다.

노무현대통령의 탄핵과 관련한 위 결정에서 헌법재판소는 “국민투표는 직접민주주의를 실현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사안에 대한 결정’ 즉, 특정한 국가정책이나 법안을 그 대상으로 한다. 따라서 국민투표의 본질상 ‘대표자에 대한 신임’은 국민투표의 대상이 될 수 없으며, 우리 헌법에서 대표자의 선출과 그에 대한 신임은 단지 선거의 형태로써 이루어져야 한다. 대통령이 자신에 대한 재신임을 국민투표의 형태로 묻고자 하는 것은 헌법 제72조에 의하여 부여받은 국민투표부의권을 위헌적으로 행사하는 경우에 해당하는 것으로, 국민투표제도를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강화하기 위한 정치적 도구로 남용해서는 안 된다는 헌법적 의무를 위반한 것이다. 물론, 대통령이 위헌적인 재신임 국민투표를 단지 제안만 하였을 뿐 강행하지는 않았으나, 헌법상 허용되지 않는 재신임 국민투표를 국민들에게 제안한 것은 그 자체로서 헌법 제72조에 반하는 것으로 헌법을 실현하고 수호해야 할 대통령의 의무를 위반한 것이다.”라고 하였던 것이다.

헌법 제72조는 “대통령은 필요하다고 인정할 때에는 외교·국방·통일 기타 국가안위에 관한 중요정책을 국민투표에 붙일 수 있다.”라고 규정하고 있다. 이에 대하여 헌법재판소의 입장과 마찬가지로 신임투표를 인정하는 것은 대의제에 기초한 대통령제에 반하는 것이라는 견해와 국민이 스스로의 정당성을 철회할 수 있는 것이므로 국민주권주의와 민주주의의 일반원리에 근거하여 인정할 수 있다는 견해의 대립이 있다.

문제의 핵심은 헌법 제72조의 성격이 ‘제한적, 한정적’ 규정인지, ‘예시적, 포괄적’규정인지의 성격규명이 우선되어야 할 것이다. 국민투표제도도 일종의 제도보장이라고 본다면 이는 ‘최소한의 보장’에 그치는 것이고, ‘최대한의 보장’을 규정한 것이 아니라고 해석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본다. 즉 동 조항의 성격은 ‘예시적, 포괄적’인 규정이므로 이를 넓게 해석하여 ‘중요정책’에 대통령 자신의 신임까지 결부시켜서 국민의 뜻을 묻는 것도 가능하다고 할 것이다.

전통적인 견해에서 신임투표를 국민투표의 내용에서 배제한 주된 이유는 신임투표가 국민의 뜻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하고, 오히려 집권자의 정당성 확보수단으로 악용된 부정적 경험에 치중하고 있다. 헌법재판소도 위 결정에서 “헌법 제72조는 대통령에게 국민투표의 실시 여부, 시기, 구체적 부의사항, 설문내용 등을 결정할 수 있는 임의적인 국민투표발의권을 독점적으로 부여함으로써, 대통령이 단순히 특정 정책에 대한 국민의 의사를 확인하는 것을 넘어서 자신의 정책에 대한 추가적인 정당성을 확보하거나 정치적 입지를 강화하는 등, 국민투표를 정치적 무기화하고 정치적으로 남용할 수 있는 위험성을 안고 있다. 이러한 점을 고려할 때, 대통령의 부의권을 부여하는 헌법 제72조는 가능하면 대통령에 의한 국민투표의 정치적 남용을 방지할 수 있도록 엄격하고 축소적으로 해석되어야 한다.‘고 함으로써 그 배경을 밝히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현대 정보화사회와 문화국가에서는 국민의 뜻을 확인하는 소통의 방법으로 유용할 뿐만 아니라, 특히 5년 단임제의 제한이 있는 우리의 경우 제도적 악용의 위험도 거의 없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현재 논란이 되고 있는 모든 문제들을 국민투표의 대상으로 하여 대통령의 신임과 결부시킬 수는 없을 것이지만, ‘사안’에 따라 또는 ‘대통령의 결단’에 따라 국민의 의사를 재차 확인할 필요가 있을 정도의 ‘중요정책’이라고 판단되는 사항에 한해서는 스스로의 신임을 연계시키는 것도 현행 제도상으로도 전혀 불가능하지는 않을 것으로 생각한다.

2009년 10월 15일 목요일

[생각] 헌법재판소 변형결정의 효력

헌법재판소의 변형결정에 대하여 그 법적 근거를 명확히 하기 위한 헌법재판소법 개정안 제출과 관련하여 대법원이 반대의 의견서를 제출함에 따라 대법원과 헌법재판소의 해묵은 논쟁이 재연되고 있는 양상이다.

변형결정이라 함은 합헌결정이나 위헌결정 이외의 변형된 형식의 헌법재판소 결정으로서 한정합헌, 한정위헌, 헌법불합치결정 등을 말한다. 이는 위헌결정이 초래할 법적 공백이나 혼란을 최소화하고 가능한 한 입법자의 입법형성권을 존중하기 위한 헌법재판소의 고민의 산물이다.

쟁점이 되고 있는 현행 헌법재판소법 제45조에서 “헌법재판소는 제청된 법률 또는 법률조항의 위헌여부만을 결정한다. 다만, 법률조항의 위헌결정으로 인하여 당해 법률 전부를 시행할 수 없다고 인정될 때에는 그 전부에 대하여 위헌의 결정을 할 수 있다.”고 규정하고 있다.

이를 근거로 대법원은 헌법재판소가 할 수 있는 결정의 형식은 위헌과 합헌결정에 국한되는 것이므로 변형결정의 효력은 법원을 구속하지 않는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으며, 헌법재판소는 이 규정의 의미가 헌법재판소가 구체적인 사건에 있어서의 사실적, 법률적 판단만을 금지하는 것이지, 당해 법률의 위헌심사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며, 위헌결정의 형식은 구체적인 상황에 따라 헌법재판소의 재량으로 결정할 수 있다는 입장이다.

한정위헌결정의 효력과 관련하여서는 1996년 대법원이 구 소득세법 제23조 제4항에 대한 한정위헌결정의 효력을 무시하고 판결한 사안(95누11405)에 대하여 1997년 헌법재판소가 “구체적 사건에서의 법률의 해석ㆍ적용권한은 사법권의 본질적 내용을 이루는 것임이 분명하다. 그러나 법률에 대한 위헌심사는 당연히 당해 법률 또는 법률조항에 대한 해석이 전제되는 것이고, 헌법재판소의 한정위헌의 결정은 단순히 법률을 구체적인 사실관계에 적용함에 있어서 그 법률의 의미와 내용을 밝히는 것이 아니라 법률에 대한 위헌성심사의 결과로서 법률조항이 특정의 적용영역에서 제외되는 부분은 위헌이라는 것을 뜻한다. 따라서 헌법재판소의 한정위헌결정은 결코 법률의 해석에 대한 헌법재판소의 단순한 견해가 아니라, 헌법에 정한 권한에 속하는 법률에 대한 위헌심사의 한 유형인 것이다.”라고 입장을 밝히고 있다.[1997.12.24,96헌마172ㆍ173(병합)]

헌법불합치결정의 효력과 관련하여서는 대법원도 “법률의 위헌 여부의 심판제청은 그 전제가 된 당해 사건에서 위헌으로 결정된 법률조항을 적용받지 않으려는 데에 그 목적이 있고, 헌법 제107조 제1항에도 위헌결정의 효력이 일반적으로는 소급하지 아니하더라도 당해 사건에 한하여는 소급하는 것으로 보아, 위헌으로 결정된 법률 조항의 적용을 배제한 다음 당해 사건을 재판하도록 하려는 취지가 포함되어 있다고 보여질 뿐만 아니라, 만일 제청을 하게 된 당해 사건에 있어서도 소급효를 인정하지 않는다면, 제청 당시 이미 위헌 여부 심판의 전제성을 흠결하여 제청조차 할 수 없다고 해석되어야 하기 때문에, 구체적 규범통제의 실효성을 보장하기 위하여서라도 적어도 당해 사건에 한하여는 위헌결정의 소급효를 인정하여야 한다고 해석되고, 이와 같은 해석은 이 사건에 있어서와 같이 헌법재판소가 실질적으로 위헌결정을 하면서도 그로 인한 법률 조항의 효력상실시기만을 일정기간 뒤로 미루고 있는 경우에도 마찬가지로 적용된다.”고 하고 있다.(대법원 1991.6.11. 선고 90다5450 판결)

헌법재판소법 제45조의 의미는 위헌법률심판에서의 위헌결정의 일반적 내용을 규정한 것이지 위헌결정의 구체적 형식을 정의한 것으로 볼 수는 없으며, 결정의 형식은 법적 안정성과 입법자의 의도 등을 존중하여 헌법재판소가 자율적으로 결정할 수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므로 개정법률로써 권한의 경계를 명확히 하는 것도 의미있는 일일 것이지만, 현행 법률의 해석상으로도 변형결정의 효력은 위헌으로 판단된 범위 내에서는 당연히 법원을 기속하는 것으로 본다.

[생각] 음주측정강제의 위헌성

현행 도로교통법은 제44조 제2항에서 “경찰공무원(자치경찰공무원을 제외한다. 이하 이 항에서 같다)은 교통의 안전과 위험방지를 위하여 필요하다고 인정하거나 제1항의 규정을 위반하여 술에 취한 상태에서 자동차등을 운전하였다고 인정할 만한 상당한 이유가 있는 때에는 운전자가 술에 취하였는지의 여부를 호흡조사에 의하여 측정할 수 있다. 이 경우 운전자는 경찰공무원의 측정에 응하여야 한다.”고 규정하여 일정한 경우에 음주측정을 강제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이에 대해서는 헌법상 불리한 진술의 강요금지를 내용으로 하는 진술거부권의 문제, 강제처분에 대한 영장주의의 문제, 형사처벌을 위한 적법절차의 문제, 그리고 음주측정의 강제가 개인의 양심을 제한하는 것인가의 문제와 헌법상의 행복추구권에서 유래하는 개인의 일반적행동자유권을 침해하는가의 문제 등이 있다.

헌법재판소는 1997.03.27, 96헌가11결정에서 주취운전의 혐의자에게 호흡측정기에 의한 주취여부의 측정에 응할 것을 요구하고 이에 불응할 경우 처벌한다고 하여도 음주측정은 호흡측정기에 입을 대고 호흡을 불어 넣음으로써 身體의 物理的, 事實的 상태를 그대로 드러내는 행위에 불과하므로 이를 두고 “진술”이라 할 수 없어 형사상 불리한 “진술”을 강요하는 것에 해당한다고 할 수 없으므로 헌법 제12조 제2항의 진술거부권조항에 위배되지 아니한다고 하였다.

또한, 영장주의와 관련해서는 음주측정은 성질상 강제될 수 있는 것이 아니며 궁극적으로 당사자의 자발적 협조가 필수적인 것이므로 法官의 令狀을 필요로 하는 强制處分이라 할 수 없어 영장주의에도 위배되지 아니하며, 추구하는 목적의 중대성(음주운전 규제의 절실성), 음주측정의 불가피성(주취운전에 대한 증거확보의 유일한 방법), 국민에게 부과되는 부담의 정도(경미한 부담, 간편한 실시), 음주측정의 정확성문제에 대한 제도적 보완(血液採取 등의 방법에 의한 再測定 보장), 처벌의 요건과 처벌의 정도(測定不應罪의 행위주체를 엄격히 제한) 등에 비추어 合理性과 正當性을 갖추고 있으므로 헌법 제12조 제1항의 적법절차원칙에 위배된다고도 할 수 없다고 한다.

그리고 음주측정요구에 처하여 이에 응하여야 할 것인지 거부해야 할 것인지 고민에 빠질 수는 있겠으나 그러한 고민은 선과 악의 범주에 관한 진지한 윤리적 결정을 위한 고민이라 할 수 없으므로 양심의 자유를 침해하는 것이라고 할 수 없으며, 입법목적의 중대성, 음주측정의 불가피성, 국민에게 부과되는 부담의 정도, 처벌의 요건과 정도에 비추어 과잉금지의 원칙에 어긋나는 것이라고 할 수 없으므로, 일반적 행동의 자유를 침해하는 것이라고도 할 수 없어 합헌이라고 하였다.

헌법재판소의 위와 같은 입장과 마찬가지로 주취운전은 개인의 생명, 신체에 대한 문제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타인의 생명과 신체, 재산에 미치는 영향이 예상하기 힘들 정도로 중대한 사안이므로 음주측정거부자에 대하여 주취운전자와 동일한 형으로 처벌하는 것 또한 헌법상 비례의 원칙에 비추어 보아도 합리적인 범위 내의 것으로서 합헌적이라고 생각한다.

2009년 10월 14일 수요일

[생각] 성범죄자의 신상공개와 전자발찌제도의 위헌성

최근 아동을 상대로 한 성폭력사건의 심각성에 맞추어 범죄자에 대한 강력한 처벌의 요구가 봇물을 이루고 있다. 청소년대상 성범죄자의 신상공개에 대해 규정하고 있는 ‘청소년의 성보호에 관한 법률’에 대해서는 이미 헌법재판소가 2003. 6. 26, 2002헌가14결정에서 재판관 4:5의 결정으로 합헌으로 판단한 바 있다. 즉 합헌의견보다 위헌의견이 많았음에도 위헌정족수인 6인에 미달하여 합헌으로 선고된 것이다.

이 결정에서 주된 쟁점은 성범죄자로부터 아동을 보호하기 위한 공익을 중시할 것인가와 범죄인 개인의 인권을 중시할 것인가의 대립으로 단순화 시켜 본다면, 4인의 합헌의견은 공익의 입장에서 사회를 보호하기 위한 선택을, 5인의 위헌의견은 현대판 ‘주홍글씨’의 수치형으로써 범죄자의 인격권을 과도하게 침해한다고 하였던 것이다.

또한 5인의 위헌의견은 청소년 성매매의 폐습을 치유함에 있어서는, 형벌이나 신상공개와 같은 처벌 일변도가 아니라, 성범죄자의 치료나 효율적 감시, 청소년에 대한 선도, 기타 청소년 유해환경을 개선하기 위한 정책 추진과 같은 다양한 수단들을 종합적으로 활용하는 것과 같은 근본적인 예방책에 치중하는 것이 더 바람직할 것이라고 하였다.

나아가 5인의 위헌의견은 청소년에게 성매수행위의 상대방이 되도록 유인ㆍ권유한 자(법 제6조 제4항) 등은 모두 청소년 성매매를 유발ㆍ조장하는 범죄자들로서, 청소년 성매수자보다 더 무거운 법정형이 예정되어 있는 데도 불구하고 신상공개는 되지 않는 점에서 청소년 성매수자만 차별하여 신상공개를 하는 것은 그 차별의 이유와 차별의 내용 사이의 적절한 균형관계를 인정할 수 없으므로 평등원칙에 위배된다고 한다.

신상공개제도는 상습적이고 재범가능성이 높은 청소년상대 성범죄자로부터 사회를 보호하기 위한 불가피한 선택인 측면이 있으며, 그것을 형벌의 일종인 현대판 ‘주홍글씨’의 수치형으로써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 다만 청소년 성매수자 뿐만 아니라 유인, 권유자에 대해서도 동일하게 신상공개의 대상이 되도록 함으로써 불평등의 문제를 시정할 필요는 있어 보인다.

전자팔찌 또는 전자발찌(electronic tagging)는 위치추적 전자장치 등 을 이용하여 팔찌나 발찌 착용자의 위치나 상태를 감시하는 장치를 말하는 것으로서 ‘특정 성폭력 범죄자에 대한 위치추적 전자장치 부착에 관한 법률(제정 2007.4.27 법률 제8394호)’이 2007년 4월 27일 공포됨으로써 2008년 9월 1일부터 시행되고 있는 제도이다.

이에 대해서는 아직 헌법재판소의 결정례가 없어 견해의 대립이 있을 수 있지만, 일단 전자발찌 등의 전자장치의 부착은 과거의 범죄행위에 대한 응보가 아니라 재차 발생할지도 모르는 상습적인 성폭력 범죄자의 재범을 예방하기 위한 것이므로 이중처벌에는 해당하지 않으며, 최근의 성범죄의 급증현상과 재범의 확대 등으로 비추어 입법목적의 정당성과 수단의 적합성은 인정할 수 있을 것이다.

다만, 구체적인 집행에 있어서는 불필요하게 과도한 장기의 부착은 범죄자의 인격권을 지나치게 침해할 소지가 있으므로 보다 덜 침해적인 방법은 없는 것인지, 그리고 전자발찌 등의 부착의 효과가 당초의 입법목적대로 범죄예방의 효과에 얼마나 기여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좀 더 신중한 분석과 접근이 필요한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이 법의 입법목적이 특정 범죄자의 재범 방지와 성행(性行)교정을 통한 재사회화를 위하여 그의 행적을 추적하여 위치를 확인할 수 있는 전자장치를 신체에 부착하게 하는 부가적인 조치를 취함으로써 특정범죄로부터 국민을 보호하기 위한 것이고, 법원은 검사의 부착명령 청구가 이유 있다고 인정하는 때에는 10년의 범위 내에서 부착기간을 정하여 판결로 부착명령을 선고하도록 하고 있으므로 헌법상 비례의 원칙에도 충실한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청소년의 성보호에 관한 법률’에 따른 신상공개제도와 ‘특정 성폭력 범죄자에 대한 위치추적 전자장치 부착에 관한 법에 근거한 전자발찌 등의 제도는 모두 급증하는 성범죄와 범죄행태의 흉포화 현상에 상응하여 구체적인 특정한 범죄에 한하여 상대적으로 사회적 약자인 여성과 청소년, 아동을 보호하기 위한 불가피한 선택인 한, 모두 합헌적인 것으로 판단된다.

2009년 10월 11일 일요일

[생각] 가산점제도의 위헌성

가산점제도란, 일정한 취업보호실시기관이 채용시험을 실시할 경우 국가유공자, 제대군인 등이 그 채용시험에 응시한 때에는 일정한 가산점을 부여하는 제도를 말한다. 제대군인 가산점의 경우는 1999년 12월 23일 위헌결정을 받아 이미 효력을 상실하였고(98헌마363), 국가유공자 가산점의 경우도 2006년 2월 23일 헌법불합치결정으로 2007년 6월 30일을 시한으로 개선입법을 조건으로 계속 적용되었었다.(2004헌마675)

헌법재판소 전원일치의 의견으로 위헌결정을 선고 받은 제대군인에 대한 가산점제도에 대하여 병무청이 10월 9일 국회 국방위원회 국정감사 업무보고에서 ‘병역의무 이행자가 우대받는 사회 풍토 조성을 위해 군필자에 대해 정부기관·공사단체 채용 때 가산점을 부여하는 병역법 개정을 추진하겠다’고 밝힘으로써 다시금 논란이 되고 있다.

논란의 핵심은 무엇보다 남성과 여성, 남성 중에서도 현역복무나 상근예비역 소집근무를 할 수 있는 신체건장한 남자와 그렇지 못한 남자, 즉 병역면제자와 보충역복무를 하게 되는 자를 차별하는 것이라는 점에 초점이 맞춰지고 있다. 더불어 직업의 자유와 관련한 공무담임권의 제한문제, 직업공무원제도의 본질적 내용의 침해여부 등도 아울러 검토되어야 할 쟁점들이다.

먼저, 직업의 자유 중 직업결정(선택)의 자유에 대하여 특별한 관계에 있는 공무담임권의 제한과 관련해서는 능력주의의 핵심적 내용인 공무수행능력과는 상관없는 단순한 병역의무이행여부를 기준으로 여성과 병역면제자 등의 공직취임권을 박탈하는 것이 헌법상 과잉금지원칙(비례의 원칙)에 부합할 것인가의 문제가 있다.

제대군인가산점제도는 군 복무를 한 남성이 종래 우리 사회에서 차별을 받아 온 집단이 아니고, 주로 헌법에서 특별히 평등을 요구하고 있음에도 차별적 취급으로 인하여 관련 기본권에 중대한 제한을 초래하게 되는 여성과 병역면제자, 제한적 복무자(보충역)를 차별하는 제도이므로 차별취급을 위해서는 역시 엄격한 심사기준인 비례의 원칙에 적용되어야 한다.

직업공무원제도의 보장과 관련해서는 비록 제대군인가산점제도가 승진이나 봉급 등의 공직 내부에서의 차별이 아니라 공직에의 진입자체를 어렵게 함으로써 여성과 제대군인이 아닌 남성으로부터 직업선택(공직취임)의 기회를 원천적으로 박탈하기는 하지만, 이를 완전히 배제하고 있는 것은 아니어서 직업공무원제도의 보장으로서의 최소보장의 원칙에는 반하지 않는 것으로 일반적으로 이해한다.

헌법재판소는 “제대군인 가산점제도는 아무런 재정적 뒷받침없이 제대군인을 지원하려 한 나머지 결과적으로 여성과 장애인 등 이른바 사회적 약자들의 희생을 초래하고 있으며, 각종 국제협약, 실질적 평등 및 사회적 법치국가를 표방하고 있는 우리 헌법과 이를 구체화하고 있는 전체 법체계 등에 비추어 우리 법체계 내에 확고히 정립된 기본질서라고 할 ‘여성과 장애인에 대한 차별금지와 보호’에도 저촉되므로 정책수단으로서의 적합성과 합리성을 상실한 것”이라고 하고 있다.

국가유공자에 대한 가산점제도에 대한 헌법불합치결정에 대하여는 그 후 개정된 ‘국가유공자 등 예우 및 지원에 관한 법률’은 국가유공자·애국지사 본인, 전몰·순직 군경, 순직공무원의 유족에게는 10%의 혜택을 주지만 해당 가족과 전몰·순직 유자녀의 자녀 중 한 명 등은 5%를 주는 것으로 조정했다. 그 동안은 국가유공자 본인 뿐만 아니라 그 가족까지도 일률적으로 10% 가산점을 적용해 왔던 것이다.

최근의 국정감사 답변과 관련하여 병무청의 제대군인에 대한 가산점제도 도입을 위한 개선입법의 입장도 국가유공자에 대한 가산점제도에서와 같이 제도 그 자체의 입법목적은 정당하므로 위헌이 아니지만, 3~5%에 이르는 가산점의 범위가 지나치게 높아 위헌적인 것이므로 이를 적정한 수준으로 조정하여 합헌적인 것으로 해석함으로써 가산점제도의 부활을 도모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문제는 이러한 가산점제도가 승진이나 봉급 등의 공직 내부에서의 차별이 아니라 공직에의 진입자체를 어렵게 한다는 데 있다. 또한 제대군인에 대한 가산점은 우선적 근로기회의 제공 등에 대한 헌법 제32조 제6항의 근거를 두고 있는 국가유공자에 대한 가산점과는 달리 헌법적 근거가 취약하다는 문제점을 안고 있다. 또한 개정된 ‘국가유공자 등 예우 및 지원에 관한 법률’상의 5~10% 혜택도 개인적으로는 지나치게 과도한 느낌이 있다.

헌법적 근거가 취약한 가산점제도가 아니라도 승진이나 봉급 등의 공직 내부에서의 혜택부여나 일정한 '사회적응자금' 명목의 지원금이나, 이미 검토 중인 것으로 알려진 현행법상 별도의 연금 보험료 납부 없이 6개월간의 가입 기간을 인정해 주던 것을 복무 기간 전체인 2년으로 늘려 인정하도록 국민연금법을 개정하는 방안 등도 고려해 볼 수 있을 것이다.

국가유공자의 예우를 반대할 사람은 별로 많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본인이 아닌 가족에 대한 과도한 가산점문제는 이견이 있을 수 있다고 본다. 굳이 공직시험에서의 가산점이 아니더라도 기존의 보훈급여금의 대상과 금액을 늘리는 방안, 기타 취업지원, 교육지원, 대부지원, 의료지원, 양로지원, 양육지원 등 그 밖의 지원 방법 등을 보다 더 확대하는 대책도 충분히 고려할 수 있다.

공직시험에 있어서의 가산점 문제는 공정한 출발의 문제이다. 출발의 불공정성은 의도하지 않은 사회적 신분의 창출로서 새로운 갈등의 씨앗이 될 수도 있다. 더군다나 경제위기의 상황과 맞불려 오늘날의 위험사회에서 상대적으로 안전한 공직으로의 선호가 몰리고 있고, 1%미만의 점수로 당락이 결정되는 현실에서는 2%이상의 가산점부여는 헌법상 평등의 원칙에도 중대한 위협이 되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헌법재판소의 입장도 제대군인에 대한 가산점과 관련해서는 가산점제도가 정책수단으로서의 적합성과 합리성을 상실한 것이라고 했다가, 국가유공자에 대한 가산점에 대해서는 다수의견이 정책수단으로서의 적합성을 인정하면서 목적과 수단간의 비례성을 충족하지 못하여 평등권을 침해하는 것이라고 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예외적으로 가산점제도를 인정하더라도 가능한한 평등의 원칙에 어긋나지 않도록 주의깊은 합의가 필요한 시점이다.



2009년 10월 9일 금요일

[생각] 오바마의 버려진 개를 말하다. 9 - 희망에의 기대

올해 2009년 노벨평화상 수상자가 버락 오바마 현 미국 대통령으로 결정되었다고 한다. 현지 노르웨이 오슬로의 발표회장의 소식을 전하는 기자들을 중심으로 한 참석자들 뿐만 아니라 미국 현지의 언론들도 의외라는 듯한 다소 놀라운 반응들을 전하고 있다.

논의의 과정은 만장일치였으며, 현재까지의 업적보다는 앞으로의 세계평화와 군축, 그리고 핵없는 세상에로의 기여에 대한 기대감의 표시로 분석하는 분위기가 대세인 듯 하다. 냉전이후 세계의 패권을 장악한 국가인 미국의 현직 대통령이 수상자로 결정된 이면의 술렁임은 한편으로는 당연한 일이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미국의 현직 대통령으로서는 러일 전쟁에서 평화 조약을 이끌어낸 공로로 1906년 수상한 시어도어 루스벨트, 국제연맹을 창설한 공로로 1919년 수상한 우드로 윌슨에 이어 세 번째 수상자이며, 비록 짧은 재임기간이긴 하지만 평화를 위해 인종과 종교의 벽을 넘나든 그의 행보를 보면 그리 새삼스러울 것도 없는 일이기도 하다.

다만, 최근 올림픽유치와 관련하여 오바마의 발로 뛰는 전방위적 노력에도 불구하고 브라질에 예상 밖의 일격을 당하면서 다소 위축된 오바마의 입장에서는 금융위기 이후의 여러 가지 정책의 수행과 건강보험개혁 등 국내의 복잡한 여론 동향과 관련하여서는 상당한 힘을 얻을 것으로 보인다.

더군다나 미국의 보수언론을 중심으로 노골적인 기득권수호투쟁 모드에 돌입한 이른바 우파의 입장에서는 그들이 사회주의라고 까지 몰아붙이고 있는 ‘오바마의 가치’가 이번 수상을 계기로 어떤 형식으로든지 힘을 얻는 것은 바라지 않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선수를 쳐서 오히려 수상의 의미를 미리 깎아 내리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노벨위원회의 공식적인 입장 중에는 미국 최초의 흑인대통령이라는 상징적인 존재에의 희망과 냉전이후 미국중심의 단일패권주의로 향하는 미국의 탐욕의 질주에 어느 정도의 제동장치로서 ‘약간의 전환’에로의 기대심리를 분명히 싣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미 노르웨이를 포함한 유럽은 리스본 조약을 통하여 대통령직과 임기 5년의 외교대표직을 신설하는 등 EU의 정치 통합을 위하여 달려가고 있으며, 아일랜드에 이어 폴란드까지 비준에 동의함으로써 현재까지 체코를 제외한 27개국의 비준을 마치게 됨으로써 조만간 거대한 공동체의 출범을 앞두고 있다.

따라서 냉전이후 미국의 패권주의와 금융위기로 인한 단일패권주의에 대한 견제의 요구 등으로 세계는 지금 새로운 가치 질서를 향하여 암중모색 중에 있다. 더군다나 우리나라를 포함하여 새로운 개발도상국의 입지가 강화되고, 특히 중국을 중심으로 새롭게 재편되는 헤게모니에서 유럽의 입지를 위한 간접적인 호의의 포석으로도 볼 수 있을 것이다.

여하튼 모든 이유를 떠나서 개인적으로는 지금 진행하고 있는 미국내에서의 좀 더 ‘사람사는 세상’을 향한 ‘오바마의 가치’를 존중하며, 그의 개혁 조치들이 가시적인 성과를 내기를 기대한다. 비록 반대에 부닥쳐서 약간의 왜곡이 있더라도 본질적인 내용에 있어서는 빛바램없이 ‘담대한 진보’가 ‘세계의 희망’이라는 바다에 도달할 수 있기를 기대한다.

물론 그가 대한민국의 대통령이 아니고 미국의 대통령이므로 철저히 ‘미국의 가치’를 존중하는 범위 내에 머물 것이며, ‘미국의 가치’가 ‘거대한 전환’을 가져온다 한들 우리의 이해관계와 충돌하는 부분은 어쩔 수 없는 새로운 도전이 될 것이다. 그렇더라도 ‘평화와 연대’에의 쉼없는 행진은 굴절없이 계속되기를 희망한다.

2009년 10월 8일 목요일

[생각] 원인에 있어서 자유로운 행위

여기 저기서 성폭력범에 대한 분노한 성토들이 일고 있다. 아직 자신의 의사표현에도 미숙한 어린 아동에 대한 성폭행뿐만 아니라, 보호의무자인 아버지의 친딸에 대한 성폭행에 이르기까지 인륜의 구분도 없이 전방위적으로 연속하여 발생하고 있어 사람들의 분노도 극에 달한 듯 싶다.

일명 피해자의 이름(가명으로 알고 있음)인 ‘나영이사건’으로 세간에 불리던 것이 피해자의 인권보호차원에서 가해자의 이름인 일명 ‘조두순사건’으로 통일하여 광고라도 하듯이 연일 언론을 장식하고 있다. 피해자의 인권을 거론하며 이 사건과 무관한 본명이 진짜 ‘조두순’인 일반 사람(同名異人)들의 인권은 전혀 아랑곳없다. 인권의 이름으로 인권을 침해하는 모순, 더불어 개명신청도 좀 늘어날 것이리라.

이런 사건들의 원인들로는 사회적인 병리현상도 그 한 축을 이루고 있을 것이지만, 무엇보다 사람들의 분노는 범죄인 개인의 반규범적 행태를 성토하면서도, 나아가 범죄인들의 성범죄행위의 원인이 음주로 인한 심신미약의 상태에서 이루어졌음에도 형을 오히려 감경받은데 따른 법원의 태도에 더 민감한 듯하다.

형법적으로는 범죄행위의 결과가 그러한 심신미약의 상태에서 행해진 경우에는 형을 필요적으로 반드시 감경하도록 하고 있다.(형법 제10조 제2항) 이러한 한정책임능력자인 심신장애의 인정여부에 대해서는 법원이 여러 사정을 종합하여 판단할 수 있도록 함으로써 광범위한 판단의 여지가 있어 더욱 비난을 피하기 어려운 입장으로 보인다.

더군다나 위험의 발생을 예견하고 자의로 심신장애를 야기한 자의 행위에 대해서는 이른바 ‘원인에 있어서 자유로운 행위’라 하여 형법이 명시적으로 형의 감경을 배제하고 있음(형법 제10조 제3항)에도 불구하고, 최근의 사건 등에서 법원은 양형판단에서 나름대로의 감경의 사유로 고려한 점이 일반 국민의 법감정과의 괴리를 더욱 크게 한 탓일 것이다.

일명 ‘조두순사건’에서는 검찰의 불항소로 인한 불이익변경금지로 인한 대법원에서의 형의 확정에로의 귀결의 불가피성이, ‘친딸사건’에서는 혈연관계와 부양의무 등이 현실적인 판단의 근거로 고려된 듯 하나, 국민의 감정으로는 보다 강력한 현실적 처벌의 수위를 요구하는 듯 하다.

응보적 엄벌주의가 최선의 방책은 아니다. 죄를 지은 사람이 죄값을 받는 것은 당연한 일일 것이나, 과도한 엄벌주의와 이른바 ‘화학적 거세’ 등의 신체적 방법이 제도화된다면, 만의 하나 혐의가 불완전한 사람도 그러한 제도의 희생양이 될 수도 있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제도가 공정한 신뢰를 바탕으로 하지 않는 경우에는 또 하나의 폭력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화학적 거세’ 등의 신체적 야만은 인륜을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또 하나의 반인륜을 제도화하는 것이다. 오늘의 문화국가에서 비록 ‘반인륜적 범죄’라 하더라도 가능한한 ‘인륜적 대책’(공소시효배제, 치료감호의 적극적 확대 등)을 모색해야 한다. ‘강제적 거세’는 당연히 배격되어야 하며, 동의를 전제로 한 ‘자발적 거세’라도 남용과 오판의 우려가 있으므로 그러한 ‘야만적 신체형’은 제도화되어서는 안된다.

피해자의 입장이 되지 않고서는 응보적 감정을 쉽게 무마하기 힘든 고통이라는 사실을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비록 현재로서는 개선불가능한 듯이 보일지라도 개선의 희망을 버리지 말고 그들을 평생을 걸쳐서라도 치료하고 교정시키는 방법을 고민하는 것이 더 바람직한 인륜적인 대책이 아니겠는가. ‘보복과 격리’의 대상이 아니라 ‘보호와 치료’의 대상임을 강조하는 것이 보다 ‘사람사는 세상’다운 일이 아니겠는가 싶다.

사랑과 용서의 힘이 죄를 지은 인간에게는 무엇보다 강력한 형벌로 느낄 수 있는 사람으로 키워내는 일, 그것이 ‘사람사는 세상’에서 살아있는 사람들에게 주어진 ‘사람으로서의 특권’일지도 모르겠다. 사람들에게서 기대하기 힘든 일이라 가끔씩 종교적 절대자의 힘을 갈구하기도 하는 것이기도 할 것이다. 사람에게서만 다 찾을 수 있다면 천국이 따로 있을 이유도 없을 것이리라. 그래도 찾아나서야 하지 않겠는가.

2009년 10월 2일 금요일

[생각] 인간의 본성과 보편적 가치

세상이 나영이 사건으로 떠들썩하다. 9세의 아동에게 50대의 성인 남자가 저지른 만행은 대부분 언론의 일치된 지적대로 ‘짐승의 행위’에 다름아니다. 반인륜적 범죄행위에 대한 인간의 존엄성, 특히 아동의 생명과 신체의 보호라는 보편적 가치에 대한 공분을 보면서 뒤늦게나마 인간의 본성에 대한 잊혀지지않은 성찰들을 발견하게 되어 다행이라는 느낌도 있다.

비록 현행 형사소송법상의 불이익변경금지의 원칙에 따라 검찰의 불항소로 1심의 징역 12년형이 선고형으로 확정되어 국민의 법감정을 거스리게 되자, 가석방을 배제한 형의 엄격한 집행약속으로 성난 여론을 무마하고 있는 형국이지만, 새로운 합의를 도출하지 않고서 현행 제도상으로는 불가피한 결론이기도 하다.

이번 사건을 통해서도 개인적으로는 본질적으로 인간의 본성, 그 바닥에 분명 ‘짐승의 본성’이 숨어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인간이 짐승과 달리 인간으로서 존엄한 이유는 그 뿐만 아니라 그와 같은 ‘짐승의 본성’을 길들일 수 있는 성찰하는 ‘인식’과 ‘의사’, 그리고 그에 따른 책임있는 ‘행동’까지 ‘학습할 수 있는 본성’까지도 갖추고 있기 때문이리라.

불의 이용과 도구의 사용보다도 언어의 학습이 인류의 발전에 획기적인 기여를 하게 된 것도 언어를 통하여 끊임없이 스스로를 되돌아 보고 오류를 수정하면서 개인적 욕망을 제어하는 ‘감성의 양육’과정을 오랜 시간을 통하여 전수함으로써 오늘날까지 인류가 문화적 존재로서 세상을 이른바 문명이라는 이름으로 지배할 수 있었던 이유가 아닐까.

물론 동일한 사실과 현상에 대해서는 개인적인 가치관에 따른 구체적인 반응으로서의 인식과 의사, 그리고 행동에는 차이가 있을 수 있을 것이다. 이번 나영이사건에 비추어 보더라도 그만한 형벌이면 족하다는 의견과 더욱 엄한 형을 선고하여야 한다는 견해의 대립이 있는 것도 그 한 예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형사적 처벌은 사후적 구제책에 불과한 것이다. 즉 사건이 발생하고 난 후에 일종의 응보적, 또는 교화적 필요에 의해서 비로소 선언되는 미봉책에 다름아닌 것이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일들이 다시 반복해서 일어나지 않도록 사전에 미리 예방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러면 도대체 무엇으로써 끊임없이 반복되는 이러한 야만들을 물리칠 수 있을 것인가.

인간이 짐승과는 달리 ‘경쟁적인 생래적 본성’이외에도 ‘연대적인 양육된 본성’까지도 아울러 가진 존재라 한다면 ‘양육된 본성’이 ‘생래적 본성’인 ‘욕망의 질주’를 제어할 수 있는 합리적인 사회적 기준들을 꾸준히 합의하면서 교육하고 실천하는 일이 중요할 것이다. 경쟁도 중요하지만 타인을 존중하는 ‘공존과 상생을 위한 경쟁’으로 학습되어야 하는 이유이다.

‘생각하는 존재로서의 인간의 위대성’은 비록 개인적, 개별적 가치에는 배치되더라도 ‘보편적 가치에 대한 존중과 배려심’에 있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그러한 보편적 가치가 다수의 대중들에게 흐르는 강물처럼 자연스럽게 스며들기 위해서는 ‘가치’라는 것들이 무엇보다 ‘소통에 따른 참여의 결과물’들이어야 할 것이다.

‘강요된 약속’이 아니라 자발적인 ‘참여의 약속’만이 존경받는 권위로서의 효력을 지닐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자신의 속에 내재된 두 가지의 본성 중에서 어느 것으로써 각자의 인격을 규정할 것인가의 개인적인 선택도 사회적 가치의 흐름으로부터 결코 자유로울 수는 없으므로 개인의 범죄는 일차적으로는 범죄행위를 선택한 범죄자 개인의 책임이겠지만, 어느 정도는 사회의 책임이기도 하다.

먹고 살기위해 넋을 놓고 달리는 사이, 이전의 혜진, 예슬을 포함하여 나영이에 이르기까지 무고한 아이들의 희생들이 잇따르고 있다. 안타까운 아이들의 피해의 그늘에 또 다른 유린되고 납치된 소중한 생명과 가치들이 가려져 있지는 않은지. 먹고 사는 문제에 지나치게 치우친 나머지 삶의 본질들로부터 너무 멀어진 것은 아닌지, 치유가 불가능한 범죄자를 양산하는 사회의 치유는 어떻게 얼마나 가능할 것인지 고민할 때다.

종교라는 이름의 성스러운 장소조차 더 이상 범죄의 현장이 되고 마는 현실, 존경받고 존경할 수 있는 개인들이 하나 둘씩 사라져가고 있는 오늘의 사회, 또 다른 허위의식들 속에서 잠시 방심하고 있는 이 순간에도 소리없이 잊혀지고 있는, 힘없이 폭력에 묻혀가면서도 침묵할 수 밖에 없는 생명과 가치들은 없는지 되돌아 볼 때다.

하나의 공동체를 구성하는 개인과 사회와 국가는 결코 모두 범죄와 범죄자로부터 완전히 자유롭지는 못할 것이므로 비록 치유가 불가능해 보일지라도 치유하기를 포기해서는 안될 것이다. 반인륜적, 반사회적, 반국가적 범죄를 통제하기 위해 개인과 사회와 국가는 또 얼마나 엄격하고 공정하게 스스로를 재단해왔는지도 돌아보아야 한다.

범죄자에 대해서는 당연히 그에 상응하는 형벌이 내려져야 할 것이지만, 최소한 끊임없이 반복되는 반인륜의 악순환의 고리를 끊어내기 위한 근원적인 해결책도 모색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형벌로서의 사형과 무기징역이 개인적 응보의 감정에는 충실할지 모르겠지만 사회적 방위의 효과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보다 더 근본적이고 조화로운 해결책은 무엇보다 구성원 각자의 내면에 숨어 있는 조급하고 이기적인 ‘경쟁적 본성’들을, 보다 더 조화롭게 타인의 생명과 권리 그리고 합의된 보편적 가치들을 존중하는 ‘연대적 본성’으로의 합리적인 ‘감성의 양육’을 강조하는 것도 한 방법일 것이다. 비록 느리더라도 꾸준한 공감을 유도하는 노력으로 믿음의 뿌리를 내릴 때 사회는 더 강해질 수 있을 것이다.

2009년 9월 26일 토요일

[생각] 야간옥외집회, 헌법불합치의 의미

미국산 쇠고기 수입을 반대하는 촛불집회와 관련하여 법원이 위헌법률심판을 제청한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 제10조와 이에 위반한 경우 처벌할 것을 규정한 동법 제23조 제1호에 대하여 헌법재판소가 헌법불합치결정을 내렸다.

헌법재판소의 9인의 재판관 중 5인은 단순위헌의 의견을, 2인은 헌법불합치의 의견을, 그리고 나머지 2인은 합헌의견을 제시하고 있다. 6인의 위헌결정을 선고하기 위한 정족수에는 미달하여 헌법불합치결정을 선고하게 된 것이다.

5인의 위헌의견에 따르면 이 결정은 이미 1994.04.28,91헌바14결정에서 합헌으로 선고한 ‘신고제’와는 달리 헌법 제21조 제2항의 ‘허가’는 행정권이 주체가 되어 집회 이전에 집회의 내용․시간․장소 등을 사전심사하여 특정한 경우에만 허용함으로써 집회를 할 수 있게 하는 제도, 즉 허가받지 아니한 집회를 금지하는 제도를 의미하는 것이므로 집회의 자유의 본질을 침해하는 것으로서 원칙적으로 금지되는 사실상의 사전허가제에 해당한다는 것이다.

즉 집시법 제10조는 야간옥외집회에 관한 일반적 금지를 규정한 본문과 관할 경찰서장의 사전적 심사에 의한 예외적 허용을 규정한 단서를 포함하여 그 전체로서 야간옥외집회에 대한 ‘허가’를 규정한 것이므로 헌법 제21조 제2항에 정면으로 위반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2인의 헌법불합치의견의 요지도 이 법 규정이 지나치게 광범위하게 야간옥외집회의 자유를 제한하는 것으로서 합리적인 범위내로의 입법을 촉구하는 내용의 결정을 한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형사처벌규정에 대한 계속적용의 불합치결정으로 인하여 처벌의 형평성으로 초래될 법적 혼란이 우려되는 점이다.

즉 적용중지의 헌법불합치결정이 아니라 계속적용의 헌법불합치결정은 사실상의 위헌결정이지만 입법형성권의 존중, 법적 안정성 등을 고려하여 새로운 법이 마련될 때까지는 당해 법률이 잠정적으로 효력을 유지하게 하는 것이므로 현재 재판이 진행 중인 형사사건에 어떤 영향을 미치게 될 것인가의 문제이다.

헌법불합치 선언된 법률이 형벌에 관한 법률이면, 종전의 법률 중 위헌으로 구분된 부분은 소급하여 효력을 상실하게 되며(헌법재판소법 제47조 제2항 단서), 그 위헌부분에 의하여 처벌받은 사람은 재심을 청구할 수 있다(헌법재판소법 제47조 제3항)고 규정하고는 있으나, 재판관 조대현의 적용중지의견에서 밝히고 있는 것처럼 이는 위헌법률에 기한 형사처벌을 허용하는 것이고 위헌법률심판제도의 사명을 저버리는 것이어서 우리 헌법상 허용될 수 없는 것이다.

적용중지의견은 헌법재판소가 어느 법률조항에 대하여 헌법불합치 결정을 하면서 그 법률조항을 계속 적용하도록 결정하려면 그 점에 대한 특별한 평의와 합의절차를 거쳐야 한다고도 밝히고 있으나, 이미 5인의 위헌결정의 속에는 적용중지의견이 포함된 것이므로 별도의 합의 없이도 적용중지를 선언할 수 있다고 할 것이다.

재판관 조대현의 적용중지의견에서도 명백히 하고 있는 것처럼 변형결정의 형식으로서 헌법불합치의견을 표시한 재판관 2인이 헌법에 합치되지 아니하는 이 사건 법률조항들의 계속적용을 결정할 수는 없는 점은 분명해 보인다.

헌법불합치결정이 사실상의 위헌결정이라는 점, 그리고 형사적 처벌은 재산적 권리침해의 경우와는 달리 국민의 신체의 자유에 대한 직접적인 위해를 초래한다는 점에 비추어 볼 때 그 성질상 법적용은 중단되어야 하며, 현재 진행 중인 재판에서도 양형판단에서만 고려할 것이 아니라 당연히 무죄선고 또는 재판의 연기를 하여야 할 것으로 생각한다.

이미 헌법불합치결정으로 사실상 위헌으로 선언된 법률을 적용하여 경찰이 집회의 현장에서 법을 적용하여 이를 집행하거나, 그것을 근거로 형사재판을 진행한다는 것은 헌법정신에도 어울리지 않을 뿐만 아니라 무엇보다 국민의 법감정에도 반하는 일이다.

5인의 위헌의견 속에 내포된 적용중지의 의미를 살리는 것이 헌법정신과 국민의 법감정에 더욱 부합하는 일일 것이며, 9인 중 5인의 의견이 이미 위헌으로서 적용중지를 의미하는 것이므로 나머지 4인의 의견이 이미 사실상 위헌으로 선언된 법률의 효력을 결정하는 것은 비합리적인 결론 일 것이라고 본다.

2009년 9월 23일 수요일

[생각] 사실과 인식, 그리고 선택

최근의 기사를 보면 북극의 얼음이 녹아 독일 화물선 두 척이 지난 7월 23일 울산에서 발전소 건설자재를 싣고 오호츠크해협을 통과해 러시아 연안 북극해를 지나 블라디보스톡에 들렀다가, 마침내 북극해를 관통하여 러시아 아르한겔스크항에 도착함으로써 새로운 항로가 개척되었다고 한다.

북동항로(North-east Passage)라고 불리는 이 바닷길을 러시아배가 아닌 국제 상선이 통과하는 것은 처음이고, 북동항로가 열림으로써 기존 항로보다 무려 1만4000㎞로 단축되어 이로부터 유발되는 경제적 효과 때문인지, 우리나라를 비롯한 주변국가들의 비상한 관심을 모으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여기서 생각해보고자 하는 것은 바로 북극의 얼음이 녹는 것이 오늘날 화두가 되고 있는 지구 온난화의 필연적 귀결인지 아니면 주기적 현상의 연속선상에 있는 자연현상에 불과한 것인지의 문제다.

지구온난화는 말 그대로 지구 표면의 평균온도가 상승하는 현상을 말하며, 그 최근의 원인에 대해서는 산업 발달에 따른 화석연료의 사용과 환경의 파괴로 정화기능이 약화되면서 생긴 온실가스의 영향때문으로 대체적으로 파악하고 있는 듯 하다.

그런데 인류의 역사를 되돌아 보면, 온난화는 비단 오늘날의 문제만이 아니라 과거에도 있어왔다고 한다. 차이점이라고 한다면 과거의 온난화의 원인은 주로 자연활동으로 인한 장기적 변화였다면, 오늘의 원인은 주로 인류의 활동으로 인한 단기적인 급격한 변화에 있을 것이다.

과학에 대해서 문외한인 내가 주목하는 것은 동일한 사실(현상)에 대한 인식의 차이들이다. 즉 북극의 얼음이 녹고 있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는데, 그것이 오늘날의 환경적 조건에 의해 결정되어지는 특수한 현상인 것인지, 아니면 이것도 일상적인 자연활동의 한 측면인 주기적인 일반적 현상에 불과한 것인가에 대한 입장의 차이들을 보게 된다.

하나의 사실에 대한 인식의 태도가 중요한 이유는 무엇보다 인류의 지속가능한 생존과 행복의 추구라는 삶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방법의 선택에 있어서도 서로 다른 대책을 추구하게 되는 데에 있을 것이다.

오늘날의 특수한 현상으로서 위기를 지나치게 강조하게 되면 불순한(?) 다른 목적이 개입됨으로써 의도하지 않은 방향으로의 자유의 구속을 초래할 위험성이 있으며, 자연의 보편적 현상으로만 보게 되면 예측할 수 없는 미래에 대하여 대비할 수 있는 시기를 놓침으로써 피할 수 없는 재앙을 초래할 위험도 외면할 수는 없는 것이다.

동일한 현상에 대한 인식의 접근을 다르게 하는 것은 바다로 가는 강물의 뿌리가 여럿이듯이 다른 각도에서 균형을 찾아감으로써 현재로서는 증명하기 어려운 해답을 모색하는 데에는 유용한 접근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절대적 진리라는 것은 사실상 존재하기 어려우므로 오류를 피하고, 실패를 줄이기 위해서도 다양한 접근방식의 선택은 여전히 유용한 분석도구일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단기적인 관점과 장기적인 관점에서의 접근도 현실적인 결과에 있어서는 확연히 서로 다른 결론을 도출하게 되는 경우가 많은 것으로 보인다. 즉 단기적으로는 위험한 현상도 장기적인 관점에서는 추세의 연속선상에 있는 자연스런 현상임을 일상생활의 주변에서도 많이 확인 할 수가 있다.

단편적인 예로 주식시장에서의 주가의 변동을 나타내는 그래프를 살펴보더라도 단기적인 변동을 나타내는 그래프와 장기적인 추세를 나타내는 그래프는 많은 차이를 보인다. 크게 보면 추세 속에 있는 자연스러운 변동도 그 속에 개입되어 있는 순간만큼은 마치 지구의 종말처럼 절박한 것이 사실이다. 현재의 금융위기도 장기적인 관점에서는 또 어느 정도의 추세를 나타낼지는 좀 더 두고 보아야 하겠지만, 단기적으로는 분명한 위험이다.

독일의 사회학자 울리히 벡(Ulich Beck)은 거대기술시스템이 가지고 있는 근본적인 불완전성에 주목하여 현대사회를 ‘위험사회’로 명명하면서, 이 위험 사회를 너머 '새로운 근대'로 진화하기 위해서는 '성찰적 근대화(reflexive Modernization)'가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그는 지금까지의 근대화는 '위험을 감수하는 선택'에 의존해왔지만, 앞으로의 선택은 '속도'보다는 '안전'을, '외형'보다는 '내실'을, '결과' 보다는 '과정'을 중시해야 할 것으로 말한다.

그러나 돌이켜보면 동 시대를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어느 한 순간도 ‘위험’이 아닌 적은 없었다. 비록 예견된 위험이었지만 감수하고 나아갈 수 밖에 없는 선택들이 일상이었다. 시간이 어느 정도 지나고 난 뒤에는 쉽게 안정적인 역사가 되지만, 눈앞의 순간들은 늘 불안정적인 위험으로 강조되면서 본성적인 불안심리를 지배한다. 그래서 종교가 불안정적인 일상적 현실과 잡히지 않는 미래에 대한 위안으로 우리 곁에 자리매김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과거의 시간을 되돌아 보면 굳이 종교가 아니더라도 자연적으로 회피할 수 있었던 사건들도 종교의 이름으로 부풀려지거나 고통을 배가한 역기능적 안순환의 경험(종교전쟁 등)들도 많이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이에 의존할 수 밖에 없는 경향들의 주류는 바로 여전히 알 수 없는 미래에 대한 불안감때문이리라. 종교보다는 과학적 성찰들이 인간의 미래에 대한 불안감들을 모두 잠재워줄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지금 뉴욕에서는 2012년 온실가스를 감축하기로 합의한 ‘교토의정서’가 만료됨에 따라 오는 12월 새로운 협약을 마련하고자 코펜하겐에서 열릴 기후변화총회에 대비하여 유엔기후변화회의가 열리고 있다. 사상 최대 규모의 회의에서 세계 정상들은 새로운 협약의 필요성에는 동의하지만, 여전히 온실가스 감축량을 둘러싼 선진국과 개도국 간 이견은 크게 좁히지 못하고 있다고 한다.

현재 분명히 진행중인 지구온난화의 사실에 대한 ‘회의론’과 ‘옹호론’, ‘추세론’과 ‘위험론’을 떠나서, 단기적으로는 분명한 현실인 ‘오늘의 위험사회’에서 장기적으로 지속가능한 생존을 하기 위해 인류가 어떤 선택을 해나갈지는 역설적으로 여전히 ‘현재의 위험’ 속에 있다. 그 선택은 ‘자유’보다는 ‘공정’을, ‘선동’보다는 ‘성찰’을, ‘탐욕’보다는 ‘공감’을, ‘독선’보다는 ‘협력’을 중시해야 할 것으로 생각한다.

[생각] 자유와 평등, 그리고 박애

구시대의 모순에 항거하여 목숨을 건 프랑스혁명의 결과로 쟁취한 이래로 시민의 권리로 인정되어 권리장전으로서 오늘날 우리 헌법에도 명시되어 있는 자유와 평등의 진정한 의미는 과연 무엇일까. 논란은 있지만 1875년 공화국 헌법(제3공화국 헌법)이 채택되면서, 추가적인 공식이념으로서 채택된 박애의 정신이란 또한 과연 무엇일까.

자유란 원하지 않는 구속으로부터의 해방을 목표로 하는 개별적 자유의지의 실현 등의 의미로, 평등이란 합리적 이유없는 차별적 대우의 배제 등으로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자유는 일반적인 행동의 자유를 그 주요 내용으로 할 것이지만, 현대 사회에서는 타인의 권리의 침해금지, 도덕규범의 준수 등을 그 내용으로 하면서 스스로의 내재적 한계를 갖는 개념이다.

평등이란 자유를 바탕으로 한 인간 본성의 질서가 예견하지 못한 또 다른 힘에 의하여 어느 한 쪽으로의 쏠림을 방지하여 균형을 유지하게 함으로써 보다 많은 다수 인간들의 삶을 풍요롭게 하기 위한 도구적 권리이다. 물론 평등권도 자유권과 마찬가지로 천부인권으로서 자연적인 기본적 인권이지만, 자유의 침해를 한계짓는 방어막으로서의 역할도 함께한다고 본다.

따라서 어찌보면 자유가 갖는 내재적인 한계는 평등의 실현으로 결정되는 부분이 존재하게 된다. 즉 개인의 무한의 자유를 인정할 수 없는 이유는 타인의 권리나 도덕규범 등을 침해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만 허용되는 것이라면, 이때 타인의 권리와 규범의 내용을 고려하는 기준으로서 중요한 것 중의 하나가 바로 평등의 이념일 것이다.

개인적인 견해로 아직도 유효한 인간의식의 활동으로서의 이데올로기의 내용도 ‘자유’를 우선할 것인가, ‘평등’을 우선할 것인가의 문제로 귀결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 방법은 모두 동일하게 민주주의를 채택하면서도 자유를 강조하면 ‘자유민주주의’체제로, ‘평등’을 강조하면 ‘사회민주주의’체제를 말하게 되는 것이리라.

견해의 차이는 있겠지만 우리 헌법의 정신은 바로 ‘자유’를 우선하는 ‘자유민주주의’체제를 기본으로 하지만, 이로 인한 사회적 불평등과 갈등을 해소하기 위해 여러 가지 ‘평등’을 고려한 제도적 장치들을 하고 있다. 대표적인 것이 국가의 규제와 조정을 허용하고 있는 ‘사회적 시장경제질서’일 것이며, 그 외에 이른바 ‘사회적 기본권’의 이름으로 보장되는 ‘사회적 자유권’들이다.

이런 이해들을 바탕으로 보면 우리의 정치질서를 ‘사회적 자유주의’로 규정하는 견해가 타당한 듯하지만, 그 구체적인 내용과 일의 선후, 방법의 선택 등을 두고는 여전히 많은 견해의 차이가 있는 듯하다. 그러므로 결국은 ‘제도의 문제’가 아니라 ‘해석의 문제’이며, ‘가치의 문제’인 동시에 ‘사람의 문제’인 것이다.

극단적인 예를 든다면 작금의 현실을 토대로 지금 20대80의 사회를 평등하다고 볼 것인가, 50대50의 사회를 평등하다고 볼 것인가. 80대20의 사회를 평등하다고 볼 것인가의 가치와 선택의 문제인 것이다. ‘보수적 세력’들은 지금 현재의 20대80의 구도를 유지하려 하고, ‘진보적 세력’들은 지금의 구도를 깨고 뭔가 변화를 추구하는 사람들일 것이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고, 정치적 동물이므로 모든 활동은 상대적인 관계 속에서 형성된다. 그리고 생물학적 존재로서의 인간의 본성은 ‘생존의 추구’이므로 바로 ‘생명현상으로서의 욕망’이다. 양육의 결과로서 ‘다듬어진 욕망’이 또 다른 인간 본성인가의 문제는 두고 보더라도 ‘생존의 본성’은 ‘양육의 본성’을 지배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민주주의’조차도 늘 감시하지 않으면 후퇴하고 마는 것이다.

변화를 추구하는 진보의 가치는 유기적 생물체의 진화에서와 마찬가지로 끊임없이 분화하므로 진보의 분열은 본질적인 생명현상이다. 그러므로 진보적 세력들이 분열하는 것을 나무라는 것은 내가 보기에는 진보더러 진보적 가치를 포기하라는 말과 같다. 따라서 진보의 연대는 일시적으로 사안별로는 가능할지 몰라도, 영속적인 연대는 본질적인 속성과 배치되므로 힘든 일이다.

자유와 평등 그리고 박애의 프랑스혁명의 사상 중에서도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박애사상이다. 1789년 8월 26일에 발표한 인권선언에도 박애는 거론되지 않았고, 혁명과 관련하여 유일하게 ‘박애’를 강조한 기록은 1793년 파리시 집정관회의이며, 1875년 공화국 헌법(제3공화국 헌법)이 채택되면서 공화국의 공식 이념으로서 등장하였다고 하지만, 박애로써 자유와 평등은 비로소 규정된다.

자유의 가치도, 평등의 가치도 박애를 바탕으로 하지 않는다면 인간본성인 ‘생명현상으로서의 욕망’과 비록 양육의 결과이긴 하지만 ‘다듬어진 욕망’의 갈등구조가 탐욕의 유혹을 뿌리치지 않고 선순환을 하리라는 보장을 할 수 없다. 끊임없이 ‘박애’를 양육해야 하는 이유이다. 일본의 새로운 총리 하토야마의 ‘우애’도 바로 이것을 말하는 것이라고 보며, 늘 가슴에 품고는 있지만 익숙하게 내뱉지 못하는 말 ‘사랑’이 또한 그것이리라.

2009년 9월 20일 일요일

[생각] 국민과 국가

제도화된 권력으로서 국가가 발생한 이후로 국가와 그 구성원으로서의 국민의 관계는 끊임없이 진화하고 있다. 국가의 지위는 크게 침탈자로서의 국가, 조정자로서의 국가, 보호자로서의 국가, 동행으로서의 국가로 나누어 볼 수 있고, 경찰국가, 야경국가, 복지국가, 문화국가의 단계를 거치면서 그 역할의 중요성도 각 의미를 달리 한다.

즉 경찰국가의 시대에는 침탈자로서의 국가의 기능이, 야경국가에서는 조정자로서의 국가의 기능이, 복지국가에서는 보호자로서의 국가의 기능이 강조되어 왔던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더라도 제도화된 권력인 국가의 본질적 속성인 침탈자, 조정자, 보호자의 성질은 오늘날도 여전히 유효하며, 현대국가의 성질을 문화국가로 보는 개인적 입장에서 국가는 공동체 형성의 동등한 요소로서 국민과 좋은 동행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원래의 의미의 문화국가는 국가가 국민의 자유를 보장하는데 그치지 않고, 이를 적극적으로 보호하는 의미의 복지국가 또는 사회법치국가와 동일한 의미라고들 하고 있으나, 개인적인 견해로서는 여기서 한걸음 더 나아가 현대 사회의 다양한 이해관계를 적극적으로 조정하여 국민의 참여를 유도하고, 이를 폭넓게 허용하면서 공감대적 공동체 형성을 위한 동등한 동반자로서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을 도모하는 능동적 동행으로서의 ‘공정국가’를 의미한다.

영국의 법학자 헨리 제임스 섬너 메인 경(Sir Henry James Sumner Maine, 1822∼1888)이 언급한 ‘신분에서 계약으로’의 ‘법진화의 법칙’도 현재까지 여전히 유효하지만, 이제는 여기서 더 나아가 계약의 형식보다는 내용을 보다 더 중요시하면서 ‘계약의 자유’에서 ‘계약의 공정’으로의 가치의 ‘거대한 변환’이 이루어져야 할 시점이다. 즉 자유만이 능사가 아니며 공정한 가치에로의 고민이 요구되는 것이다.

칼 폴라니는 그의 저서 ‘거대한 변환’에서 자본주의 체제의 불안정요인은 상품화할 수 없는 것들 또는 상품화해서는 안 되는 것들을 상품화했기 때문이라고 했다. 즉 인간이 인간일 수 있게 하는 가치인 노동능력, 제도와 신뢰의 표시인 화폐, 만인이 공유해야 할 자연 등을 상품화함으로써 자본주의는 필연적으로 불안을 발생시킬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지금은 인간의 본질적인 자유마저도 상품으로서 포장되고 있는 것은 아닌지 경계할 일이다.

자본주의 체제의 불안정성이 그 가치의 본질적 성질의 것이라면, 그리고 그 불안정적 요인들을 욕망을 바탕으로 하는 현대 사회의 구조에서 완전히 제거해버릴 수는 없는 것들이라면 불안정 요인들의 안정적이고 선순환적인 작용을 위한 기제들의 장치가 필요할 것이다. 그 제도를 운영하는 가장 강력한 권력이 국가이므로 ‘자유를 향한 절차에서의 국가의 공정’이 더욱 요구되는 이유이다.

지금 우리뿐만 아니라 세상은 비록 시장을 강조하고는 있지만, 합리성을 전제로 하는 본래적 의미의 시장은 흔적을 찾기 어렵고, 욕망의 한계를 넘어 경쟁의 이름으로 탐욕의 질주를 하고 있는 ‘난장(亂場)’만이 보일 뿐이다. 더욱이 오늘날 위험사회의 문화국가에서 공정한 심판자로서의 국가기능과 역할의 강조가 더욱 필요한 이유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근 우리 국가기관이 국민을 상대로 명예훼손을 이유로 손해배상소송을 제기하는 것과 같이 국민을 향한 국가의 적대적 행태는 역사를 거꾸로 돌려 과연 국가가 국민에게 무엇으로 존재하는가에 대한 의문을 다시금 갖게 한다. 정부가 법원을 동원하여 국민을 상대로 무엇을 얻고자 함이며, 그것이 이른바 ‘명예’라면 누구의 무엇을 위한 명예인지 묻지 않을 수 없다.

국민에게 책임을 묻기보다는 차라리 노무현처럼 다시 정부의 신임을 묻는 것이 오히려 더 떳떳하지 않겠는가. 현행 헌법상으로는 신임투표가 불가능하다는 견해도 있으나, 이미 선례로서 헌법적 관습이 되어 있으며, 규범도 유기적 진화의 형식으로 이해하는 개인적 입장으로는 현행 헌법해석으로도 가능한 일로 생각한다. 성찰없이 일방적으로만 관행화된 권력행사는 권력을 휘두르는 자와 영향을 받는 자들 모두를 잔인하게 만들며 결국에는 많은 다수를 불행하게 함으로써 공동체의 상처로 남게 된다.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는 레위기 19장 18절 말씀과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받고자 하는 대로 대접하라’는 마태복음서 7장 12절 말씀은 하나의 하느님을 두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는 그가 국가의 원수이든, 국민이든 동일한 행동원리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더군다나 공동체의 행복을 지향하는 문화국가로서의 성찰하는 ‘공정국가’라면 국민을 상대로 침탈자로서 싸움을 벌이기보다는 조정자, 보호자로서 더 큰 사랑을 실천함으로써 더 많은 사람들이 행복할 수 있는 동행으로서의 본분에 충실해야 할 것이다.

2009년 9월 13일 일요일

[생각] 사상의 자유의 진화


최근의 개헌 논의에 있어 기본권적 측면에서도 사상의 자유를 양심의 자유와 구별하여 별도로 규정하려는 입장들이 있다. 학자들의 입장도 양자를 구별하여 이를 지지하는 입장과 양심의 자유로 충분하다는 입장, 그리고 양심의 자유와 구별되지만 현행 헌법상의 다른 규정을 근거로 사상의 자유를 도출할 수 있다는 견해 등으로 나뉘고 있다.

개인적인 견해로는 현행 헌법의 규정으로도 충분히 사상의 자유를 규정할 수 있으며, 구체적인 근거로 일차적으로는 헌법 제19조의 양심의 자유를 들 수 있고, 부차적으로는 헌법 제10조와 제37조 제1항 등을 그 근거로 들 수 있을 것이다.

‘사상’의 개념을 ‘개인의 외부 세계에 대한 인식의 형성과 그 실현’으로 이해한다면, 헌법재판소의 ‘양심’에 대한 넓은 정의인 세계관, 인생관, 주의, 신조 등에 포섭될 수 있는 것으로 이해되며, 일반적으로는 사람이 인간·자연·사회에 대해 품는 현실적이며 이념적인 의식의 형태를 총괄하는 ‘이데올로기(ideology, 주의, 主義)’를 포함하는 것이리라 여겨진다.

이데올로기라는 용어는 데스튀트 드 트라시(Destutt de Tracy)의 ‘이데올로기원론’(1804년-1815년)에 처음으로 등장한 이후,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공저 ‘독일이데올로기’(1845년)에서는 관념 그 자체가 아니라 생산양식 등의 사회의 하부구조와의 관계성에 있어서 파악되는 상부구조로서의 관념을 의미하는 ‘허위의식’으로서의 이데올로기까지 다양한 정의들이 있다.

또한, 냉전의 종결 후 오늘에 이르러서는 사회민주주의적인 중도, 복지정당이 세계의 대세를 점하여 이전의 이데올로기를 내세움 없이 직업적, 전문적인 정치가・관료에 의하여 순수한 생활향상을 목표로 하는 것이 현대의 대세라며, 성급하게 나아가 이데올로기의 종언을 고하고 있는 실정이다.

그러나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고, 정치적 동물이며, 여전히 의식으로써의 조종이 가능한 존재이므로 쉽사리 이데올로기의 종언을 말하는 것은 섣부른 판단이 아닐까하는 생각이다. 물론 이전의 계급투쟁을 향한 기계론적 관점과는 달리 현대 사회에서는 다양한 가치들의 상대적인 관점의 기능론적인 측면을 더 강조하는 차이는 있지만, 이데올로기는 인간사회에서 여전히 유효한 ‘의식활동’임에 분명하다.

요즘 흔히 말하는 보수와 진보의 대립도 이러한 이데올로기의 한 측면으로 이해할 수 있고, 보수적 가치와 진보적 가치가 각자의 생활향상을 목표로 하더라도 그 구체적인 내용에 있어서는 스스로도 다양한 차이를 내포하고 있는 개별적 가치들의 갈등과 욕망의 구조로 뚜렷이 남아있는 현실은 누구도 부인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개별가치들도 크게 다시 세가지의 부류집단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즉, ‘교활한 집단’과 ‘성찰하는 집단’ 그리고 ‘무지한 집단’이 그것이다. 이에 대응하여 보수적 집단은 ‘교활한 보수’, ‘합리적인 보수’, ‘무지한 보수(날보수)’로, 진보적 집단은 ‘교활한 진보’, ‘책임있는 진보’, ‘무지한 진보(날진보)’ 등으로 구분 가능하다고 본다.

이른바 ‘성찰하는 집단’으로서 ‘합리적 보수’와 ‘책임있는 진보’는 끊임없이 조화로운 공생의 방법을 찾기 위해 고민하는 가치의 본질에 충실한 바람직한 집단의 사람들이며, ‘교활한 진보’와 ‘교활한 보수’는 비록 깨어있지만 변절을 일삼아 신뢰할 수 없는 이기적인 집단들이고, ‘무지한 보수(날보수)’와 ‘무지한 진보(날진보)’는 소질과 환경의 영향으로 맹목적인 가치에 종속된 성향을 보이는 계몽이 필요한 대상들이다.

‘성찰하는 집단’으로서 ‘합리적 보수’와 ‘책임있는 진보’의 대화가 수월한 이유는 그들 집단의 공통점인 ‘제도화된 세력’이라는 점에도 이유가 있다. ‘교활한 진보’와 ‘교활한 보수’들도 같이 제도화된 세력들이지만 진정성이 부족하며, ‘무지한 보수(날보수)’와 ‘무지한 진보(날진보)’는 ‘개인과 제도로부터 소외된 세력’으로서 쉽사리 극단적인 선택과 행동에 이용당하기 쉬운 경향들이 있다.

오늘날의 사회도 예전의 역사와 마찬가지로 이러한 세력들 간의 끊임없는 갈등과 투쟁, 그리고 연대의 연속선상에 있다. 다만 싸움의 형식적인 모습만 차이가 있을 뿐, ‘먹고 살기위한 전쟁’은 계속되고 있는 것이다. 각자의 사상은 여전히 유효한 생존의 가치들이며, 연대를 향한 갈증은 변함없는 인간 삶의 현주소다. 그러므로 이데올로기는 끝난 것이 아니라 시간을 따라 진화하고 있을 뿐이다. 개헌논의와 상관없이 사상의 자유가 무엇보다 중요한 이유이기도 하다.

2009년 9월 12일 토요일

[생각] 인식과 의사, 선의와 악의


6일 새벽 예고없는 갑작스런 북한의 댐 방류로 경기도 연천군 임진강 수위가 높아져 야영객 등 6명이 모두 숨진 채 발견되는 사고가 있었다. 북한은 7일 판문점 남북 적십자 채널을 통해 황강댐 방류에 대한 해명을 요구하는 우리측 전화통지문에 대해 이례적으로 발빠르게 답변을 보내왔지만, 인명피해와 관련해 사과나 유감 표명은 없었다.

비록 북한은 통지문에서 "댐 수위가 높아져 물을 방류했다"면서 "앞으로 많은 물을 방류할 때는 사전 통보하겠다"고 밝혔으나, 당시 북한쪽 강원도와 황해남도 지역에 수해가 우려될 기상조건이 아니었다는 점, 또 새벽시간에 많은 물을 한꺼번에 쏟아낸 점에 대한 해명이 충분치 않다는게 대체적인 시각이다.

통일부 장관은 9일 북한의 예고 없는 대량 방류로 우리 국민 6명이 사망·실종한 ‘임진강 참사’에 대해 국회 외교통상통일위원회 회의에서 의원의 질의에 ‘북측이 의도를 갖고 했다고 보고 있다’고 말했으며, ‘북한이 이번에 무단 방류를 했다고 스스로 밝혔고, 이는 사고나 실수에 의한 방류가 아니라 북한의 의도적 방류를 확인한 것’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정부는 나아가 국제법 위반 여부를 검토하고 있으며, 전문가의 견해는 명백히 국제 관습법상 모든 국가는 국제하천을 이용함에 있어 다른 국가에 피해를 주지 않도록 적절한 조치를 취할 의무가 있으므로 이의 위반에 대한 책임을 물어야 한다는 입장이다. 그러나 선언적 의미 이상의 실효적인 대책은 사실상 없는 실정이다.

그런데 지난 10일 북측이 ‘임진강 사건’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없이 우리 정부에 개성공단 북측 근로자의 임금 인상 문제와 관련, 예년 수준인 5% 인상안을 제시한 것으로 확인되어 사실상 지난 6월 남북 간 2차 실무회담에서 제시한 개성공단 북측 근로자 임금 300달러 인상안을 별다른 논의 없이 스스로 철회한 것으로 보여 북한 내부의 미묘한 갈등상황도 엿보이고 있는 현실이다.

‘임진강 참사’ 희생자에 대한 보상협상은 한차례 결렬되는 등 난항 끝에 11일 유족과 수자원공사, 연천군이 희생자 1명당 5억원의 보상금을 지급하기로 합의했으며, 경보관리시스템 오작동으로 피해를 막지 못한 것으로 드러난 수자원공사 임직원 5명에 대해서는 직위해제 조치가 내려졌다.

분명 이번 사건에서 북한은 ‘물을 방류’한다는 사실에 대한 인식은 분명히 있었다고 봐야 한다. 그러나 그 방류로 인하여 우리 측의 인명피해에 대해서는 충분히 예견할 수 있었느냐에 대해서는 별도로 따져볼 수 있겠으나, 방류의 규모로 볼 때 ‘미필적 고의’, 즉 인명피해가 있을 수도 있지만 별로 개의치 않은 흔적들을 충분히 발견할 수 있다.

이번 사건을 벌써 많은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희미해지고 있는 ‘용산 참사’와 비교해 보면 많은 유사점이 있다. 상황을 놓고 볼 때 인명피해의 가능성을 예측할 수 있지 않았느냐의 문제와 회피가능한 다른 방법이 있었음에도 최선의 주의의무를 다하지 않은 책임으로부터 과연 모두가 자유로운가의 문제에 있어서는 여전히 의문이 많다.

현재 진행 중인 재판에서 검찰은 참사 관련 수사기록 중 경찰관들의 직무집행에 위법이 있었는지에 대한 수사기록 3000여쪽을 열람·복사할 수 있게 해주라는 법원의 결정에도 불구하고 이를 공개하지 않고 있다고 한다. 검찰의 비공개입장은 확고한 듯 하며, 용산 참사의 희생자들은 보상은 커녕 한마디의 사과도 얻지 못하고 주검을 안고 여전히 거리에 있다.

두 사건을 놓고 볼 때 ‘임진강 사건’에 대한 북한의 책임은 분명해 보이며, ‘용산 사건’에서도 이유야 어떻든 억울한 생명들의 희생이 있었고, 정치적인 견해와 상관없이 ‘생명의 기준’으로 볼 때도 의심의 여지없이 보편 타당한 기준으로 차별없이 존중받아야 할 존귀한 생명들이며, 동등한 권리를 가진 국민들이었다.

세상에 선의와 악의가 있다면, 종교적 기준 이전에 제도적으로 이미 마련된 법의 기준에 더욱 충실할 필요가 있다. 즉 악의는 ‘알고 행하는 것’이며, 선의는 ‘모르고 저지르는 일’이다. 행여 누군가 타인에게 허용할 수 없는 피해를 준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의도적으로 어떤 일을 도모한다면 그는 분명히 ‘세상의 악의’다.

법의 정신은 그런 보편 타당한 정의의 기준에 최대한으로 충실해야 한다. 법의 저울은 여전히 건재한데, 법을 해석하고 적용하는 잣대들이 균형감각을 잃어 버리면 권위는 땅에 떨어지고 신뢰는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 법의 문제가 아니라 사람들의 문제인 이유다. 진보하는 역사는 소급하여서도 그 책임을 묻는 것이 헌법정신이라는 사실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2009년 9월 11일 금요일

[생각] 탐욕의 제국에 숨겨진 얼굴


로마 제국의 역사를 가진 나라, 이탈리아의 총리가 연일 구설수에 오르내리고 있다. 실비오 베를루스코니(Silvio Berlusconi)는 2000년 포브스지가 집계한 개인자산 순위에서 120억 달러의 재산을 보유하여, 이탈리아 1위, 세계 14위의 부자로 기록된 인물로서 이탈리아 최대의 미디어그룹의 소유주이자 유명 축구구단인 AC밀란의 구단주이기도 하며 1994년~1995년, 2001년~2006년 이탈리아 총리를 지낸 데 이어, 2008년 5월부터 다시 총리로 재직 중인 인물이다.

실비오 베를루스코니 이탈리아 총리의 부인 베로니카 라리오(53)여사는 베를루스코니 총리가 속옷모델 노에미 레티치아의 18세 생일파티에 참석한 사실을 알게 된 후 4월 말 이혼을 결심하게 되었으며 섹스 스캔들로 남편이 ‘세상 사람들 앞에 우스운 인물’이 되고 있어 참다못해 이혼을 요구한 것으로 보도되고 있다.

실비오 베를루스코니 이탈리아 총리는 지난해 자신의 로마저택에서 성매매 여성들과 밤샘파티를 즐겼다는 의혹이 불거지는 등 끊임없는 추문에 휩싸였고, 2007년에는 현재 기회균등부 장관이 된 방송연예인 출신 마라 카르파냐에게 ‘내가 결혼을 하지 않았다면 지금 당신과 결혼할 것’이라고 말했다가, 부인 라리오의 강력한 요구로 언론을 통해 공개 사과하는 망신을 당한 바 있으며, 최근에는 쇼걸들을 유럽의회 선거에 출마시키려는 시도로 여전히 시끄럽다.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할 정도의 역사적 자부심을 배경으로 하고 있고, 지금도 로마의 한 가운데 로마의 주교, 즉 교황이 통치하는 신권 국가로서 가톨릭교회의 상징이자 중심지인 바티칸시국을 둘러싸고 있는 하늘 아래에서 일어나고 있는 그대로의 현실이다.

법학을 전공한 베를루스코니는 기업가로서 성공을 하였으나 막대한 자금조성경위는 여전히 베일에 싸여 있으며, 수많은 법적 공방에서도 상황을 유리하게 조성하여 일국의 총리에 까지 오르게 되었다. 나아가 그가 장악하고 있는 미디어매체들과 스포츠구단과 여러 관심사업들을 엮어서 국민들의 마음을 통째로 장악하고 있다며 큰 소리를 치고 있고, 여전히 많은 국민들이 자신을 지지한다고 호언하고 있다.

문제는 비록 이탈리아의 새로운 뉴스보도방침이 이른바 정치적 공방이 큰 사안에 대해 ‘정부-야당-여당’ 순으로 입장을 듣는 ‘샌드위치뉴스’ 방식으로 시청자들의 심리를 교묘히 이용하고 있다고는 하지만, 다수의 국민들이 그의 말대로 그의 삶의 방식을 경외하고 있는 듯한 분위기도 상당한 부분 자리잡고 있는 것도 사실인 듯 보이는 점이 있다. 예를 들면 대부분의 국민들이 그처럼 부자가 되고 싶어 한다는 인터뷰 등이다.

정치학자들조차 사람들이 베를루스코니의 남성우월주의 기질에 익숙해져 있고, 금새 이번 일들을 잊을 것이며, 베를루스코니는 변함없이 좌파에 대한 신랄한 공격을 개시할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실비오 베를루스코니 이탈리아 총리는 자신의 인기가 여전히 높고, 자신은 ‘아름다운 여성들’을 포함한 모든 이를 사랑한다며 비판적인 여론을 비웃으면서 ‘이탈리아 국민은 내 안에서 스스로를 발견하는 것으로 보인다’라고 까지 말할 정도로 자만에 젖어 있는 지경이다.

국민들의 여론까지 자신의 모습에서 나온다는 오만에 찬 탐욕의 제국의 현실을 보면서 그 속에 가려진 제국의 국민들의 얼굴들도 과연 실비오 베를루스코니 이탈리아 총리의 얼굴을 닮아 있을 것인가에 강한 의문이 있지만, 그가 여전히 그의 방식대로 득세하여 간다면 그의 얼굴이 바로 이탈리아 국민들의 얼굴이 될 것이다. 지금 대한민국의 얼굴이 대한민국 다수 국민들의 숨겨진 얼굴이었듯이 말이다.

2009년 9월 9일 수요일

[생각] 존재와 인식과 규범



사회현상의 하나인 범죄의 원인을 두고 학자들은 일반적으로 소질과 환경을 그 원인으로 설명하고 있다. 소질이란 본성이 좌우하는 부분이어서 자유의지보다는 유전학적 범죄행위결정인자를 중요시하고, 환경은 양육의 결과로서 범죄인이 처한 사회적 환경을 범죄의 주요 원인으로 보고 분석하는 입장이다.

형사정책적인 입장에서 범죄의 대책과 관련하여서도 유전학적 본성인 소질의 측면을 강조하는 입장에서는 범죄가계연구를 중시하고, 생물학적 측면에서의 범죄대책, 예를 들면 거세나 단종 등의 방법도 불사하면서 범죄자를 치료의 대상으로 파악하는데 반해서, 양육의 조건인 사회적 환경을 범죄의 원인으로 중요시하는 입장에서는 범죄의 대책도 범죄인의 개선과 교화에 초점을 맞춘다.

역사적으로 범죄행위에 대한 책임인 형벌의 부과에 대해서도 예전에는 주로 응보형주의에 치우쳐 있었다면, 오늘날은 책임에 따른 형벌, 특히나 개선이나 교화형에 중점을 두고 있는 것이 행형의 현실인 듯하다. 그 책임의 근거와 관련해서도 존재와 인식에 따른 책임이냐, 아니면 규범에 따른 책임이냐의 논란이 있다.

극단적인 일탈행위인 범죄를 제외한 일반의 사회현상에 있어서도 과학에서의 실험의 결과와는 달리 동일한 조건하에서도 인간행동의 반응은 동일하지 않다. 이는 오늘날 70억명의 인류가 하나의 인간의 유전자를 가지고서도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70억가지의 문화를 형성하고 있는 현실로서도 이야기될 수 있겠다.

과학에 대해서는 문외한이지만 과학적이기 위해서는 최소한으로 요구하는 것이 계량화될 수 있고, 증명가능하며, 동일한 조건하에서 동일한 결과를 요구하는 것들이라면, 분명 인류는 과학적인 본성들을 갖고는 있으나, 그 삶의 결과인 문화는 늘 과학적으로 잘 설명되지는 않는다. 그것이 과학에서는 항상 최선을 요구하지만, 현실에서는 차선에 만족해야하는 이유인지도 모르겠다.

개인적으로 과학은 존재를 탐구하여 그 구성요소들을 분석하여 체계화하는 학문이며, 철학과 문학은 현상을 인식하여 설명하는 학문이고, 종교와 규범학은 통제되지 않는 인간 의지의 경계를 제어하는 학문이라고 생각한다. 따라서 인간의 삶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어느 하나의 분야만으로 완벽하게 해결할 수는 없으며, 모두를 관통하는 통합적 사고가 필요한 이유이기도 하다.

자유의 확장영역도 마찬가지여서 70억 인류의 자유는 그들의 존재론적인 공통분모를 추출해내어, 각자의 문화와 환경의 조건들에 대한 인식을 근거로 규범적인 틀을 넓혀가며 만들어가는 공동체작업에 다름아니다. 각 지역이나 국가마다 자유의 실현형태가 차이가 나고, 자유에 책임이 따르는 이유이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그렇더라도 인간이 인간으로서 당연히 존중받아야 할 생명과 평등, 행복의 추구와 같은 본질적 권리를 제한해서는 안 될 것이며, 인간다운 생활을 위한 최소한의 조건들(예를 들면, 기본소득제도 등)을 제도적으로 보장하여 존엄한 인간의 문화를 가능한 많은 사람들이 함께 누릴 수 있었으면 하는 바램을 가진다.

인간이 인간으로서 존엄한 이유가 있다면 생물학적으로 우열한 유전자가 있어서가 아니라, 인간은 스스로를 존엄하게 만들어갈 수도 있는 제도적 존재이기때문은 아닐까. 그렇더라도 믿을 수 없는 제도로써 인간의 존엄성을 침해당하지 않기 위해 안전망으로 그 사이에 신의 영역을 작위적으로 만들어 놓은 것은 아닐까.

아무튼 인간의 존재로부터 결정되는 인간의 삶을 인식하고 자유의지로 인간다운 삶을 영위하려고 하는 다수 인간들의 공동의 작업이 인간문화의 요체일 것이다. 따라서 규범으로서의 종교와 법도 신이 생물학적으로 존재하는가의 여부와는 상관없이 분명히 제도로서 있는 것들이며, 중요한 것은 각자의 선택에 대한 자유와 존중일 것이다.

[생각] 언어와 문화와 생존



새 정부가 출범한 이후의 변화 중 하나가 이른바 글로벌인재의 육성에 기여할 목적으로 영어교육의 중요성을 많이 강조하고 있다. 때맞춰 인터넷기술의 발달로 등장한 SNS미디어의 등장으로 영어의 세계화에 한껏 힘이 실린 모습이다.

신자유주의의 급격한 확산은 결국 무한경쟁을 초래하고 가장 경쟁력있는 존재만이 살아남는 시스템이므로 결국은 많은 사람들이 사는 길이 아니라 극소수의 사람만이 살아남는 체계이다. 그러므로 이른바 경쟁력있는 소수의 선진국들이 자유주의의 이름으로 과감한 대항해를 계속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예고도 없는 경제위기에 봉착하자 예외없이 말로만 자유주의를 내세우면서 자국의 이익을 보호하기 위한 모든 생존의 보호조치들을 취하고 있다. 대외의존도가 높은 우리의 입장에서는 지나친 보호주의보다는 무역에서의 자유주의입장이 유리할 듯하여 현 정부는 자유무역을 지속적으로 강하게 주창해오고 있는 것 같다.

그러한 시대상황이나 여건상의 필요에 의하여 영어교육을 부수적으로 중요시하는 것은 당연한 일일 것이지만, 우리의 문화를 소홀히 하여 자칫 우리의 글과 말이 사라져버리기라도 한다면 지나친 비약일지는 모르지만 결국은 민족의 흡수소멸이라는 비극을 초래하게 될지도 모를 일이다.

민족주의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생존의 문제를 말하고 싶은 것이다. 우리가 아무리 영어를 중요시하고 잘한다고 할지라도 그들의 문화 속에서 습성이 된 사람들과는 경쟁이 되지 않을 것이며, 극히 소수의 과학기술자나 자본가, 그들의 자손만이 살아남을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아프리카의 예를 들어보더라도 많은 선진국들이 빵으로 그들을 다스리고 있지만, 아직도 사라지지않고 있는 이유는 그들의 언어와 문화가 여전히 살아있기 때문이다. 만약 그들이 그들의 문화와 언어까지 이른바 세계화의 이름으로 영어로 통일한다면 모든 면에서 취약한 그들이 지구상에 존재할 수 있겠는가?

일각에서는 선진국의 물량공세에 무너지고 있는 징조도 보이지만 여전히 그들의 언어와 문화를 지키고 있기 때문에 그들도 그들의 자원을 무기로 하여 무시할 수 없는 거래의 상대방이 되고 있는 것이며, 다른 외부세력으로부터도 고려할만한 시장으로서 그들의 생존을 보장받고 있는 일종의 안전한 보호막을 갖춘 것이다.

아무리 가치와 제도를 떠들어도 위기의 상황에는 결국 생존의 문제와 욕망의 경쟁만이 남게된다. 지금도 암암리에 희귀자원들을 무기화하여 그들만의 리그를 도모하고 있는 이때 모든 것이 희소한 우리가 살아남는 길은 영어의 경쟁력은 키우되, 우리 말과 글을 중심으로 한 우리의 문화를 지키고, 독창적인 기술력을 키우는 일이어야 할 것이다.

어찌보면 신자유주의라는 것은 욕망의 탈을 쓴 탐욕의 신제국주의의 다른 이름에 불과한 것일지도 모를 일이다. 개인의 욕망을 인정은 하지만, 지나친 탐욕을 경계하면서 공동체의 질서 속에서 각자의 자유를 지켜내기 위해서라도 우리의 말과 글, 그리고 문화를 더욱 소중히 지켜내야할 것으로 생각한다.

2009년 9월 7일 월요일

[생각] 오바마의 버려진 개를 말하다. 8 - 욕망의 사회


오바마가 백악관에 입성한 지도 벌써 9개월째에 이르고 있다. 연일 언론들이 호들갑을 떨면서 관심을 보였던 ‘퍼스트 도그(First Dog)’의 주인공은 ‘포르투칼 워터 도그’ 종의 강아지로 결정되었으며, 최근의 전해지는 근황을 보니 그 새 많이도 컨 것 같다.

최근 미국 사회의 가장 큰 화두는 뭐니뭐니해도 오바마의 공약 중 하나인 ‘의료개혁’의 문제인 듯 하다. 그러나 공화당을 중심으로 한 미국의 보수진영들은 그들의 언론과 보험, 제약사를 중심으로 한 관련업계를 앞세워 연일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키기에 혈안이 되어 있는 듯 하다.

저명한 경제학자 폴그루그만은 이를 개인들 속에 잠재된 욕망의 분출로서 미국 사회의 광기로 묘사할 정도이니, 여기서 우리는 현재 세계에서 가장 민주적이고 경제적 선진국 중의 하나라는 인간 사회를 통해서 이기적 탐욕을 향한 무한 질주의 위력을 보는 듯 하여 마음이 가볍지만은 않다.

진보적 가치를 내세우며 출발한 오바마는 백악관 참모진들의 구성부터도 기득권층인 보수진영을 배려한 인사정책을 구사했고, 모든 행보에서 우리의 전 대통령 노무현처럼 ‘공생을 위한 조화’에로의 고민의 흔적들을 많이 보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수진영을 중심으로 한 기득권층으로부터 사회주의자로 매도 당하고 있는 상황까지 닮아 있다.

그의 고민의 깊이와는 반대로 지지율은 연일 하락하고 있다는 보도가 잇따르고, 조직적인 반발까지 가세하여 오바마의 앞으로의 행보에도 많은 어려움이 예상된다. 일단은 기한을 다소 연장하여 타운홀미팅을 통한 여론수렴과 설득을 하고는 있지만, 민주당 내부의 보수진영까지 노골적인 반발을 하는 터라 장담할 수는 없을 것 같다.

미국의 의료시장은 우리와 달리 강제보험으로서 공보험인 전국민의료보험체계가 갖추어져 있질 않고, 65세 이상의 노인들에게 제공되는 의료보장제도인 ‘메디케어’와 빈곤층에게 제공되는 의료보장제도인 ‘메디케이드’를 제외하고는 대부분이 사보험 영역에 맡겨져 있는 것 같다.

전국민의료보험을 내세우던 오바마도 최근 하원에서 잠정 합의된 ‘의료 개혁안’에서는 최초 안보다 많이 후퇴하여 의료보험 제공의무를 면제받는 중소기업을 늘였고, 연방 정부가 저소득층에 제공하는 의료보험 가입 보조금은 줄였다고 한다.

심지어 오바마는 ‘공공보험을 도입할지 말지가 의료 개혁의 전부가 아니고 아주 작은 부분에 불과하다’며 공공보험 도입자체를 포기할 수 있음도 내비치고 있다고 하니, 최근 아프칸 파병과 관련한 대외적인 정책들과 맞물려 오바마의 고민과 위기를 더욱 심각하게 느끼게 한다.

우리의 경험으로 비추어 볼 때 노무현의 ‘지나친 고민’이 결국은 정치적인 영역에서 양쪽으로부터 비난받는 결과를 초래하고, 그를 무마하는 과정에서 확실한 진영가치의 실현에는 성공하지 못한 점을 반추해보면, 지금 오바마가 처해있는 심정이 어느 정도 이해는 간다.

그러나 노무현은 ‘진보적 가치’와 ‘보수적 가치’의 양쪽진영의 측면에서는 실패로 규정할지는 몰라도 확실한 ‘노무현의 가치’는 실현한 듯이 보인다. 내가 생각하는 노무현의 가치는 ‘보다 많은 사람들이 좀 더 사람답게 사는 세상 만들기’였으며, 그 측면에서 개인적으로 일단의 성공을 했다고 평가하기 때문이다.

백악관의 ‘퍼스트 도그(First Dog)’ 선정과정에서도 최종적으로 ‘포르투칼 워터 도그’와 ‘라브라두들’이 선정되었을 때 ‘포르투칼 워터 도그’가 백악관의 낙점을 받은 이유가 ‘라브라두들’은 라브라돌 리트리버와 푸들의 교배견이라는 점에서 제외되었다는 후문까지 있는 걸 보면 피할 수 없는 미국 사회의 뿌리 깊은 갈등들도 엿보인다.

스스로를 잡종견에 비유하며, 미국 사회의 재건을 내세운 오바마가 뿌리 깊은 내부와 외부의 적에 담대하게 대응하여 미국 사회의 희망을 이어나갈 수 있을 것인지 앞으로의 행보가 더욱 주목되는 이유이다. 또한 우리의 의료민영화의 도입문제와 관련하여서도 방향의 설정에 많은 시사점이 될 것 같다.

오늘의 현대 사회는 ‘욕망의 사회’다. 인류의 종말이 있다면 그 시기는 자연재앙으로 인한 ‘지구의 종말’이 아니라 인간 개개인이 탐욕의 꼭지점에 이르는 순간이 될 것이다. 탐욕을 다스리지 않으면 상생은 불가능하며, 탐욕을 다스리는 제도만이 존경받는 권위로서 기록될 것이다.

노무현을 잃고난 후에야 노무현의 가치를 새삼스럽게 확인하고 있는 지금, 오바마를 잃고 오바마의 가치를 알게 되는 너무 늦은 시기 이전에 탐욕의 광기를 끊고, 절제된 욕망의 선순환으로 ‘보다 많은 사람들이 좀 더 사람답게 사는 세상 만들기’의 가치가 실현되길 바란다.

어제의 노무현처럼 계급장 떼고 국민의 신임을 다시 물을 용기와 모든 것을 걸고 자신의 가치를 위해 싸울 진정성이 오바마에게도 있을 것인지 지켜볼 일이다. 브레이크없는 욕망의 질주 속에서 ‘오바마의 가치’가 적절한 제동장치의 역할을 제대로 할 수 있기를 바란다.

2009년 9월 5일 토요일

[생각] 소외와 소통, 그리고 개헌


일반적으로 소외의 현대적 정의에 대하여는 무력감, 무의미성, 무규범성, 자기소외 등 여러가지 의미로 논의되고 있고, 전통적으로는 자본주의하의 노동의 소외를 주장한 마르크스의 소외 개념 등이 있다고 한다.

마르크스의 전통적 개념은 개인의 심리적 상태와 상관없이 객관적인 상황만으로 소외를 정의하고 있는 듯 하고, 어떤 사람들은 소외를 하나의 규범적 개념으로 파악하여 인간의 본성이나 자연법에 근거하여 기존의 제도를 비판하기 위한 하나의 도구로 설명하고 있는 입장들도 있는 모양이다.

또한 소외 중에서도 자기소외를 강조하여 소외란 하나의 사회심리학적인 사실로서 무력감, 무의미성, 무규범성의 체험으로부터 출발하는 개인적 소외감정에 논의의 초점을 맞추는 견해들에 이르기까지 아직까지도 많은 견해들이 있는 것 같다.

결국 논의의 핵심은 소외란 어디로부터 출발하는 것인가의 문제, 즉 제도로부터의 소외인가, 자신으로부터의 소외인가, 그리고 그 극복방법은 무엇인가의 문제가 될 듯 싶다. 개인적인 결론부터 말하자면 소외의 원인은 개인과 제도, 둘 다의 문제라고 생각한다.

마르크스를 비롯한 전통적인 견해들의 배경은 제도의 권위에 개인이 대항하기에 역부족이었던 시기에 기존의 권위를 부정하기 위한 도구로써 소외의 개념이 사용된 듯 하며, 현대에 와서는 어느 정도 민주화의 성과가 시스템의 소통구조로 반영되기 시작하면서 개인의 소외감정, 즉 자기 소외가 부각되고 있는 듯 하다.

그러나 오늘날에 있어서도 소외의 문제는 비단 개인의 문제만이 아니라 개인과 사회, 인식과 제도 모두에 그 원인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사회제도가 소외의 원인인 때에는 외부의 적극적인 개입으로, 개인의 인식과 태도가 소외의 원인인 때에는 자유의지로 극복해야 할 문제가 될 것이다.

그러나 산업혁명 이후 인간의 소외는 기계파괴운동으로부터 출발하여 구조적인 소외로 확장되었으며, 자유주의에 대한 사회주의 강화의 빌미가 되었다. 그 이후 정치 경제적인 영역에 있어서 권위있는 제도로서의 국가가 개입하여 조정자로서의 역할을 하도록 요구받게 된 계기이기도 할 것이다.

우리의 현행 헌법상의 경제질서도 ‘사회적 시장경제질서’로 이해하는 것이 다수 학자의 견해이다. 즉 시장의 자유경쟁에 완전히 떠 맡기는 것이 아니라, 공정한 경쟁이 될 수 있도록 어느 정도의 규제와 조정, 개입이 예정되어 있는 것이다.

오늘날 신자유주의의 이름으로 세계화와 국제화, 글로벌스탠더드를 강조함으로써 그 흐름에 편승하지 못한 많은 사람들이 제도로부터, 개인으로부터 소외되고 있다. 또한 정보화사회의 급격한 진행으로 시간의 흐름 자체가 소외의 진행이 되고 있는 현실이다.

그러므로 각자의 이해관계의 대립은 첨예화 되고, 화합과 통합은 점점 더 어려운 고난의 작업이 되고 있다. 따라서 오늘날과 같은 사회에서 요구되는 최선의 가치는 ‘다양성의 존중’일 것이다. 서로가 ‘서로 다름’을 인정할 때 비로소 소통의 실마리를 찾게 되는 것이다.

소외의 극복이 소통의 목적이고, 소통의 시스템화가 정치의 목적이라고 이해할 때 최근의 개헌논의와 관련하여 우리의 통치구조는 대통령제보다는 의원내각제가 바람직하다고 생각하며, 선거제도는 다양성의 존중차원에서 중대선거구제, 비례대표와 직능대표로 구성되는 상원과 지역대표로 구성되는 하원의 양원제가 보다 합리적이라고 본다.

그리고 현대사회의 변화 속도에 비추어 볼 때 의원을 비롯한 선거직의 임기를 장기화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을 것이다. 선거직의 확대와 선거직에 대한 국민소환제도의 도입, 그리고 헌법개정안에 대한 국민제안권의 도입 등도 소외의 극복을 통한 소통의 시스템화를 위해서 필요적으로 논의되어야 할 사항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역시 제도의 문제라기보다는 지도자의 철학이다. 제도가 어떻든 그 제도를 운영하는 최고지도자의 선택과 행동이 보다 직접적으로 갈등을 키우기도 하고, 줄이기도 한다. 갈등의 원인이 소외이고, 소외의 극복이 소통으로써 갈등을 해소하는 길이라는 것에 진정성으로써 동의한다면 굳이 개헌을 하지 않더라도 이미 제도적 준비는 충분하다고 할 것이다. 오직 할 것인가의 문제일 뿐이다.

2009년 8월 27일 목요일

[생각] 좌우의 좌표


오늘날 우리 정치에서 늘 회자되는 좌우라는 개념의 역사적 출발은 많은 사람들이 구제도에 대한 개혁의 시발점으로 평가하는 프랑스대혁명 당시 입헌군주제 지지세력이었던 의회의 오른 쪽 점유자들과, 새로운 변화를 갈망하며 공화제 지지세력이었던 의회의 왼쪽 점유자들의 자리 위치에서부터 시작한다고 한다.

그리고 이후 나폴레옹의 제정과 일시적 왕정복고를 거쳐 1848년 2월혁명으로 완전히 구제도가 타도됨으로써 오늘날의 자유주의의 모태가 되었으며, 구제도에 대한 대항세력이었던 시민계급이 무산자계급(프롤레타리아)과 유산자계급(부르조아)으로 분리되어 전자는 사회주의 좌파의 세력으로, 후자는 자유주의 우파의 세력으로 이어지는 것으로 흔히 묘사되고 있다.

또한 그 이후로도 각 지역의 시대상황과 이해관계에 따라 현대 정치사의 새로운 화두인 신자유주의에 이르기까지 분열과 연대는 줄곧 있어 왔다. 우리의 현대사에 있어서도 일각에서는 김대중의 국민의 정부를 최초의 좌파정권으로 규정하고, 노무현의 참여정부에 이르기까지를 그 연장선에서 이해하는가 하면, 어떤 사람들은 모두 결과적으로 우파정권이지 좌파정권은 아니라는 입장도 있으며, 각양각색이다.

개인적인 짧은 생각으로는 좌우의 대립은 우리가 역사적으로 규정하고 있는 프랑스혁명의 훨씬 이전부터 존재해왔던 것이며, 오히려 인류의 ‘먹고 사는 문제’(노무현의 고민 중 큰 하나이기도 했던)인 역사와 함께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근원을 따져 자세히 설명할 능력은 없지만 음양의 조화를 통하여 중용의 도를 추구하는 동양의 사상들에게서 더 수월하게 그 뿌리를 찾을 수 있을 것이라고도 본다.

그러므로 역사라는 것도 개인을 떠나서는 생각할 수 없으므로 신채호가 본래 의도한 의미와 같은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그러한 개인으로부터 출발하여 역사를 정의한 ‘아(我)와 비아(非我)와의 투쟁’이라는 표현이 더 적확하다고 보며, 그러한 개인과 사회(비제도화된 권력으로서의 좁은 의미의 사회), 국가 (제도화된 권력으로서의 넓은 의미의 사회) 간의 관계를 어떻게 설정하며, 각자의 역할과 기능을 어떻게 조정할 것인가의 대립으로 요약된다고 할 것이다.

따라서 그 절충적인 산물인 ‘좌파적 자유주의’와 ‘우파적 사회주의’ 등의 용어가 모순이 아니라 현실을 더 정확하게 반영하고 있는 표현들이며, ‘합리적 보수’와 ‘책임있는 진보’는 현재의 위험사회에서 그러한 고민들의 반영이라고 생각한다. 개인과 사회와 국가가 동등한 역사의 원동력이듯이 좌우를 불문하고 모든 가치들은 서로가 다른 지향점을 갖더라도 하나의 공동체 내에서는 동등하게 존중되어야 하는 것이다.

좌파적(진보적) 입장에서는 현실의 부조리와 모순을 강조하여 사회개혁의 입장에서 최대한의 변화를 추구해 나가는 것이고, 우파적(보수적) 입장에서는 현재 있는 그대로의 입장에서 현실유지적 최소한의 변화만을 지향하는 것으로 대강의 정의를 할 수 있을 것이다. 강의 흐름에 비유한다면 진보적 가치는 흐름(변화)을 있는 그대로 존중하는 경향을 가지고, 보수적 가치는 그들만의 댐을 만드는데 집중한다.

주로 대부분의 좌파적(진보적) 사람들은 강의 상류에 사는 사람들이고, 우파적(보수적) 사람들은 주로 강의 하류에 사는 사람들이다. 상류는 상류대로, 하류는 하류대로 그 강을 경계로 또 양분되어 있지만, 모두 같은 바다(인간의 존엄과 가치, 행복추구)를 향하고는 있다. 하류가 바다에 가까이 있다고 해서 그들이 보편적 가치에 더 충실한 것은 아니며, 상류도 또한 하늘(바다와 같은 보편적 가치)에 보다 가까이 있지만 그들만의 승천(가치실현)으로는 대지를 적시지 못한다. 그러므로 진보는 늘 분열하되 어느 지점에서 합류할 것인가를 고민해야 한다.

상류의 사람들은 하류보다 많은 갈래로 나뉘어 분열과 투쟁이 그 속성처럼 되어 있으며, 연속되기 힘든 가는 줄기로 인하여 금새 말라버릴 우려가 있는 취약성으로 말라죽지 않을 정도의 최소한의 복지적 정책과 안전망이 요구되며, 하류의 사람들은 대세를 있는 그대로 유지하여 기득권을 보호하길 선호하므로 대체적으로 간섭받길 싫어한다. 그러므로 양쪽의 균형을 유지하여 강을 연속하여 흐르도록 하기 위해서는 흐름을 이끌어 가는 제도세력의 철학이 중요시되는 것이다.

제도세력의 기반이 좌파적이었든, 우파적이었든 간에 일단 제도적 권력이 되면 스스로 분명한 한계를 가진다. 아무리 좌파적이고 진보적이라고 하더라도 제도로서의 권력은 본질적인 균형지향성 또는 그 밖의 이유로 ‘공동체의 안정’을 전면으로 내세운다. 그러한 ‘안정성추구’가 바로 양날의 칼이 되는 것이며, 같은 공동체의 구성원으로서 비제도화된 세력으로부터 제도에 대한 끊임없는 견제가 요구되는 이유가 되기도 한다. 따라서 진보세력 중에서도 제도화된 진보의 가치와 제도화되지 않은 ‘날진보’의 색깔은 또 다르다.

지배이데올로기로서의 제도에 대한 끊임없는 견제는 지속적인 감시체계와 책임을 물을 수 있는 시스템을 갖추는 일이 급선무다. 과학기술의 발전으로 ‘전자민주주의’의 가능성까지 논의되고 있는 이 즈음에는 국민이 직접 참여하여 투표권으로서 통제할 수 있는 여건들을 최대로 확대시키는 것도 그 한 방법이다. 민주주의도 차선인 마당에 대의제가 최선일 수는 없다. 간접민주주의(선거기회의 확대를 주로 한 참여의 확장)를 기본으로 하되, 직접민주주의의 요소들(국민투표, 국민소환, 국민발안 등)을 확대하는 것이 중요한 의미를 가지는 이유이기도 하다.

결론적으로 좌우의 좌표는 결코 좌우 비례의 직선일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나 비록 곡선으로 일시적 치우침이 있더라도 지향점은 늘 양자의 균형을 향해 가는 것이어야 한다. 내 눈으로 볼 때는 모두가 회색인인 지금 ‘회색인들의 사회’라고 맹목적인 자책과 비난을 할 것이 아니라 회색의 스펙트럼 중에서도 가치를 선택하고 행동의 순서를 정하는 본질에 더 충실하여야 할 것이다.

강은 경계를 따라 흐르지만, 그것은 분열의 진행의 아니라 통합의 과정이며, 그 회색의 물빛이 겉으로 힐끗 보기에는 전부 같은 빛으로 보일지는 몰라도, 스스로의 색깔을 잃지 않고 물들지 않으며 각자의 빛깔로 함께 어울리며 흐르고 있다는 성찰과 자각이 회복불가능한 강의 오염과 고갈을 방지하는 본질일 것이며, 다수의 그런 생각들이 모일 때 물빛은 또한 겉으로도 달리 보일 수 있는 것이리라. ‘먹고 사는’ 문제 중에 어디에 방점을 찍을 것인가에 따라 흐르는 강물의 좌표가 결정된다.

2009년 8월 22일 토요일

[생각] 듣고 말하기와 읽고 쓰기


최근의 기술의 발전과 더불어 한사람이 다른 사람으로부터 듣고, 말하고, 읽고 쓰는 기회가 점차 증가하고 있다. 특히 인터넷의 발전으로 카페나 블로그, 채팅이나 마이크로블로깅 등을 통하여 더더욱 실시간 네트워킹을 통한 소통의 기회가 증가함으로써 ‘1인미디어시대의 시민저널리즘’까지 화두가 되고 있는 현실이다.

이미 대세를 거스르기는 힘든 일로 보이지만, 이러한 문화를 확산시키려는 정부의 의지와 관련 기업의 이해관계 등을 이유로 문화의 확산속도는 일정 부분 조정을 받게 된다. 일례로 통신기업의 이해관계와 맞물려 이미 세계적인 열풍의 주역인 아이폰의 국내도입문제가 늘 문턱을 넘어서지 못하고 머뭇거리고 있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이러한 현실을 지켜보고 있는 관련업계의 종사자들은 더할 나위없는 조급함과 답답함으로 참고 있기 힘든 모양이다. 그 분야에서 세상의 진보를 빨리 내다보고 예측하는 그들의 입장에서 어쩌면 정보문명사회에서 ‘고립된 섬’으로 남겨져 많은 기회들을 놓치게 되지나 않을까하는 진심어린 염려들로 느껴진다.

그들이 걱정하는 동태적 문화와 정태적 문명의 고립도 문제가 되겠지만 더더욱 큰 문제는 ‘개인의 고립’이다. 더욱이 최근의 열풍의 주역인 트위터를 비롯한 마이크로블로깅을 통한 소셜네트워킹이란 것이 새로운 소통의 수단으로 부상하고 있는 즈음에 우리는 또 하나의 시민들의 자연적 권리를 잃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의문이 있다.

‘소통’이란 막힘이 없이 흐르는 것이며, ‘의사의 소통’이란 내심적 의사의 왜곡, 굴절없는 표현이라고 대강의 정의를 한다면(이 세상에서 정의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개인적 입장에서 보면 정의는 곧 오류이기는 하지만) 표현의 자유, 자유로운 접근이용의 자유(Access권) 등의 자연적 자유를 개별기업의 이익을 목적으로 하는 그들의 경제적 자유에 의해 묵살당하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듣고, 말하고, 읽고, 쓰는 행위는 모두 차별없이 인간의 소통을 향한 자유로운 표현의 수단인 것이며 듣고 말하는 것이 본능에 기초한 행위이고, 읽고 말하는 것은 사후적 교육의 결과든, 듣고 읽는 것이 소극적, 수동적 행태이고, 말하고 쓰는 것은 능동적, 적극적 행태라는 구별이 있을지라도 그것들의 총합은 주체적인 개인의 자발적인 의지의 표현이라는 사실에는 다름이 없으므로 본질적 내용들은 제한없이 보장되어야 한다.

듣고, 말하고, 읽고 쓰는 행위는 또한 인간을 가장 인간답게 하는 창조적 지성을 만들어가는 유용한 도구들이다. 가려서 들으면서 그 숨은 의미를 파악하고, 이미 내 뱉은 말도 토론하여 주체적으로 수정하고, 타인의 간접적인 경험들을 통해 행간의 의미들을 읽어내고, 자신의 의지를 기록하는 일련의 과정들은 하늘로부터 물려받은 침해할 수 없는 인간만의 권리임에 틀림없다.

좋은 해몽이 좋은 꿈을 만들고, 좋은 해석이 좋은 법을 만드는 것과 마찬가지로 주어진 제도를 어떻게 활용할 것인가의 문제는 동시대인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주체적인 자각과 실천하는 역량에 달려있는 문제일 것이다. 인간은 듣고, 말하고, 읽고 쓰는 행위를 통한 합리적인 해석의 과정을 거쳐 창조적으로 낡은 제도를 개선하고, 폐기함으로써 새로운 자유를 발견하고 개선된 제도를 구성함으로써 성숙해가는 것이 아닐까 싶다. 그것이 또한 동시대인의 공감대적 가치를 발견해 나가는 필수적인 수단이기도 한 것이다.

귀와 입을 막고, 눈과 손을 가두기에는 듣고, 말하고, 읽고, 쓰려는 강물의 기세는 방향을 틀 수 없을 정도로 분명하고 세계적이다. 세상이 하나로 모이는 바다로 너무 늦지 않게 합류하는 가장 쉬운 길은 큰 줄기를 따르는 것이리라. 국가작용의 편이성이나 기업의 경제적 자유보다는 시민 개개인의 표현의 자유와 일반적 행동의 자유를 우선하는 것이 오늘날의 보편적 가치를 기준으로 볼 때도 합리적임은 분명해 보인다.

2009년 8월 20일 목요일

[생각] 자유와 제도

자유는 제도인가? 자유는 제도가 아닌 것인가? 자유는 제도일 수 밖에 없는 것인가? 자유는 제도와 동행가능한 것인가? 이런 물음에 대한 답은 딱히 그렇다, 아니다라고 일률적으로 이야기할 수는 없고, 역사적으로도 시대상황에 따라 끊임없는 논쟁의 대상이 되어오고 있는 것 같다.

헌법상으로 자유란 다소 견해의 차이가 있긴 하지만 천부인권으로서 그 본질적 내용을 제한할 수는 없는 것이다. 하늘로부터 물려받은 권리이므로 군주나 국가가 은혜적으로 베푸는 것이 아니라 인간으로 태어나는 순간부터 당연히 가지게 되는 자연적인 권리인 것이다.

전통적으로 자유는 제도 권력인 국가에 대항하면서 개인의 운신의 폭을 넓혀온 투쟁의 산물이기도 하다. 국가의 역할도 전체주의, 군국주의, 권위주의시대에는 개인의 적으로서 침탈자로서의 역할에 충실했지만, 민주주의가 사회 전반에 뿌리를 내림으로써 그나마 보호자, 후원자, 조정자로서의 역할이 강조되고 있는 것이다.

내용이 형식을 결정하고 형식이 내용을 결정한다고 하더라도 끊임없는 상호간의 피드백을 통한 소통이 있어야 한다. 자유는 일정부분 제도이더라도 그것이 전부가 아니고, 제도가 아닌 자유의 영역도 끊임없이 개척되고 발견되어어야 하는 것이다.

따라서 자유는 제도와 제도가 아닌 것들을 모두 포괄하는 것이며, 제도로서의 자유는 과거의 정태적인 현상을, 제도가 아닌 자유의 영역은 치열한 현재의 동태적 사실을 규정하는 것으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인간의 존엄과 가치를 바탕으로 행복을 추구하는 수단으로서 민주주의가 더욱 필요한 이유다.

그러므로 보수적 성향의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제도인 자유에 집착하게 될 것이고, 진보적 성향의 사람들은 제도가 아닌 자유의 영역의 개척에 보다 더 주력하게 될 것이다. 그렇게 동시대인의 의견들을 수렴하여 또 하나의 제도를 만들고, 수정하면서 창조적 파괴의 과정을 이어나가는 것이 민주적 삶 아니겠는가.

흐르는 강물에 비유하자면, 제도로서의 자유는 기존의 정해진 물길이며, 제도가 아닌 영역의 자유는 물의 양에 따라 범람을 거듭하며 새롭게 내는 물길이다. 새로운 물길이 일정한 주기로 일상적이 되면 그 또한 제도가 되는 것이고, 바다로 가는 물길은 정해진 하나의 길 외에도 여러 갈래가 있을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런데 그 물길을 콘크리트 장벽으로 둘러치고 나면 가장 큰 문제는 소통의 단절이다. 자연적인 정화과정의 차단으로 지속적으로 인위적인 통제를 필요로 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면 오히려 더 큰 사회적, 경제적 비용을 부담해야 할 것이고, 사후에 잘못을 발견하여 교정하기 위해 노력하더라도 원상회복이 불가능할 수도 있을 것이다.

지도자의 역량이란 큰 줄기를 제대로 세우는 그런 뿌리이면 족하다. 스스로 꽃이 될 것이 아니라 꽃을 피우는 일에 주력해야 하는 것이다. 줄기가 높을수록 뿌리는 더 깊이 암흑 속으로 박혀야 한다. 그것이 보다 많은 자유의 열매를 맺는 일이고, 바다로 가는 진정한 동행인 제도로서의 자유의 진정한 속성일 것이다.

제도는 의식적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자유의 발걸음 아래서 흔적을 남기듯이 자연스럽게 만들어지는 것이다. 본질이 한걸음 나아가면 그림자도 한걸음 나아가는 것과 같은 그런 동행인 것이다. 그러므로 누구도 어떠한 이유로도 자유의 길을 막아서는 안된다.

제도는 정오의 햇살을 마주한 자유의 그늘이다. 구름이 태양을 가리더라도 전부를 침해해서는 안되는 이유이기도 하고, 어둠이 깔리면 운신의 폭도 줄어드는 한계를 가진 것이기도 하다. 그렇더라도 침해할 수 없는 본질은 새벽이 오면 다시 태양이 뜨는 것과 같은 자연과 같은 자유인 것이다.

2009년 8월 19일 수요일

[생각] 문화와 문명

개인과 사회와 국가에 있어 문화란 과연 무엇이며, 문명이란 또한 무엇인가? 정치문화란 무엇을 내용으로 하는 것이며, 정치문화의 수준이란 또 어느 정도의 질적 평가를 전제하는 것인가?

사전적 의미로는 문명이란 ‘물질적으로는 생활이 편리해지고 정신적으로도 발달하여 세상이 진보한 상태’를 의미하고, 문화는 ‘인간이 자연상태에서 벗어나 일정한 목적 또는 생활 이상(理想)을 실현하려는 활동의 과정 및 그 과정에서 이룩한 물질적·정신적 소득의 총칭’을 말하는 것으로 정의하고 있다.

견해에 따라서는 문화의 의미를 문명을 포괄하는 보다 광범위한 것으로 이해하기도 하고, 문화와 문명을 구별없이 같은 뜻으로 함께 혼용하고 있기도 한 것 같다. 위키백과사전에 의하면 에드워드 버네트 타일러는 1871년 그의 사회인류학 저서에서 “문화 또는 문명이란 제 민족의 양식을 고려할 때 한 사회의 구성원이 갖는 법, 도덕, 신념, 예술, 기타 여러 행동 양식을 총괄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에서는 주로 자연과 대립하는 개념으로서, 인간을 제외한 자연은 객관적·필연적으로 생기지만 이러한 자연을 소재로 하여 목적 의식을 지닌 인간의 활동으로 실현되는 과정을 ‘문화’라고 정의한다. 유네스코는 2002년 “문화는 한 사회 또는 사회적 집단에서 나타나는 예술, 문학, 생활양식, 더부살이, 가치관, 전통, 신념 등의 독특한 정신적, 물질적, 지적 특징”으로 정의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문화든 문명이든 간에 각 개인의 생활영역에서 관계로 맺어지는 일정한 공간적, 집단적 특성을 공통분모로 찾아볼 수 있을 것 같다. 개인적인 견해로 볼 때 문화와 문명을 구분짓는 것은 바로 시간적 특성과 연속성여부로 그 차별성을 찾을 수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즉, 인류문명의 발생지로 크게 4대문명을 들고 있는데, 이것을 문명이라고 이름하는 것은 과거 특정한 시기에 특정한 지역에서 특정한 형태로 정의할 수 있는 공통된 생활양식이었던 것이고, 문화란 지금까지도 그러한 생활양식상의 특성들이 명맥을 유지하고 살아있는 현재의 현상을 말하는 것으로 이해한다. 다시말하면 문명이란 고정된 과거의 정태적인 현상인 것이고, 문화는 현재도 진행중인 동태적 특성을 강조하는 개념인 것이다.

정치문화란 그 중에서도 정치적인 생활양식의 특성을 말하는 것이리라. 우리의 정치문화는 역사적으로 볼 때 크게 원시시대의 족정(族政), 고대 왕정(王政), 군국주의하의 제정(帝政), 현재의 공화정(共和政)으로 대강의 분류를 한다면, 다른 생활영역에서의 역사적 문명이란 것은 존재했을지라도 최소한 정치적인 생활영역에서는 과거의 ‘문명’이라고 할만한 것은 없었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군주의 폭정에 항거하거나, 외세에 항거한 역사들이 비록 성공적이지는 못했지만 시대정신으로 살아남아 명맥을 유지하면서 오늘의 헌법상 대한민국의 임시정부의 법통을 이어받은 공화국으로서 계승하여 빛과 어둠을 교차하면서도 민주주의를 점차 폭넓게 실현해가고 있는 현재까지 한(恨)처럼 끈질기게 살아있는 연속적인 정치‘문화’는 있다.

비록 외세에 의해 주어진 미약하고 혼란스러운 갈등과 함께 출발한 민주주의였지만, 절망의 독재를 넘어 문민정부, 국민의 정부로, 권위주의를 넘어 참여정부로 정치적인 진보를 거듭하며, 배부르지는 않았지만 희망을 현실로 한걸음씩 이어갈 수 있었다. 이젠 지나간 시간이지만 누구든지 차별없이 거리낌없이 토로 할 수 있었던 늘 열려있던 광장도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때로는 친구로서, 또 때로는 원망의 대상으로서 민주주의의 자유로움으로 희망을 밝혀 준, 노무현과 김대중 두 분의 전직 대통령이 잇따라 서거하고, 거리의 광장은 하나 둘씩 소통없는 벽으로 막혀간다. 촛불을 켜기도 전에, 목소리를 내기도 전에 사람들의 눈빛과 가슴은 굳디자인의 방패에 쫒겨난다. 죽어도 살아있던 ‘오늘의 문화’들이 ‘어제의 문명’이 되고 있다.

문화는 ‘끊기지 않고 흐르는 강’이다. 문명은 ‘길을 잃은 막힌 호수’다. 바다가 먼 계곡의 상류든, 바다에 가까운 강의 하류든 길을 막는 것은 단절인 것이며, 흐름의 중단은 곧 역사의 퇴보다. 정치문화의 수준을 결정하는 가장 큰 기준은 바로 소통의 폭과 연속성일 것이다. 민주주의를 향한 가능한 모든 길은 열려있어야 한다. 그것이 바다로 가는 가장 빠른 길이다.

비록 전직 대통령의 서거에 대한 관례에 따라 노무현 대통령은 국민장으로 치뤄졌지만, 그 때 닫혔던 광장은 열리는 듯하고, 김대중 대통령의 경우는 비록 6일로 단축되긴 했어도 국장으로 예를 갖춘다고 하니 뒤늦게나마 다행스런 일이다. 때맞춰 북한의 조문단도 방문하여 죽어서까지 평화통일의 염원을 담은 그 분의 뜻을 기린다고 하니 이를 기회로 끊어진 물길들이 다시 이어졌으면 하는 바램을 가진다.

그래서 과거 10여년 동안, 아니 두 분 전직 대통령들의 평생동안 어렵사리 씨를 뿌리고 꽃 피워온 민주주의의 정치문화가 문명도 아닌 채 초라하게 과거의 역사 속으로 사라지지 않고 지속가능한 문화로서 더욱 화려한 부활을 기할 수 있도록 그 분들의 정신을 계승하여 평화적인 조국의 통일도 앞당겨 맞이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싶다.

2009년 8월 18일 화요일

[생각] 개인과 사회와 국가

깊이 있는 논의는 잘 알지 못하지만 창조설에 따르면 아담과 이브 이래로 인간은 사회적 존재였던 것 같다. 진화론에 따르더라도 인간이 동물과 구분되는 단초는 아마도 상호간의 관계의 의미를 존중하기 시작한 때부터가 아닐까싶다.

개별 존재로서 공동체 구성요소로서의 개인과 그러한 개인들의 집합체인 공동체로서의 사회와 국가는 역사의 발전단계와 시대상황에 따라 서로 그 의미와 긴장관계를 달리 한다.

오로지 물리적 힘에 의해서 사회적 계급이 결정되던 원시사회로부터, 종교와 강제적 권위에 의한 특수계급의 힘이 절대적이었던 중세봉건사회, 그리고 비록 부분적으로 시민의 각성이 시작되었으나 자본의 힘이 국력의 대부분을 상징하던 근대 절대주의국가사회를 거쳐, 근로자와 여성에게 까지 참정권이 확대되기 시작하면서 본격적으로 시민의 역할이 중요한 기능을 담당하는 오늘의 현대 사회에 이르게 되었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을 이른바 ‘역사의 진보’라고 평가한다면, 그 진보의 의미는 ‘공동체를 구성하는 다수의 사회적 의사결정과정에서의 참여의 확대’라고 이해된다. 따라서 역사가 진보하기 위해서는 ‘구성원 다수의 참여의 확대’가 전제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개별 사회의 구성요소인 개인이 제도화된 공동체로서의 국가의 의사결정에 참여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오직 투표를 통해서이다. 그런데 현재 우리 제도상으로 보장된 투표권은 공직선거법상의 대통령, 국회의원, 지방자치단체장, 지방의회의원 등의 선거권과 중요정책과 헌법개정에 관한 국민투표권 등을 들 수 있다.

이러한 투표권을 행사함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모두가 동의하지는 않더라도 간접선거보다는 직접선거가 민주적 정당성의 측면에서는 보다 더 강화된 지위를 가진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대통령간선제를 직선제로 바꾼 것이 우리 헌정사의 큰 전환점이 되었듯이 제도적으로 국민참여의 폭과 절차를 대폭 완화해가는 것은 역사의 진보임에 분명하다고 본다.

간접민주주의보다는 직접민주주의가 모든 측면에서 우월적인 제도라고 할 수는 없겠지만, 소통의 단절과 왜곡이라는 대의민주주의의 결함을 예방하기 위한 측면에서는 부분적으로 직접민주주의의 수단들을 보충하여 보다 더 강화해 나갈 필요는 있을 것이다.

직접민주주의는 국민투표, 국민발안, 국민소환 등을 그 주요 내용으로 한다. 그 중 우리의 현실은 국민투표제도만 부분적으로 도입하고 있고, 국민발안과 국민소환제도는 도입하고 있지 않다. 지방자치단체장에 대한 주민소환과 같이 대통령과 국회의원에 대한 국민소환제도의 도입도 향후 개헌논의와 관련하여 심도있게 논의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개인과 사회와 국가는 역사의 동등한 원동력이다. 공동체로서의 사회와 국가는 그것의 제도화 여부에 따라 제도화되지 않은 공동체를 ‘사회’라는 이름으로, 제도화된 공동체는 ‘국가’라는 이름으로 역사를 만들어가고 있으며, 독자적인 역할과 기능을 하고 있다. 물론 넓은 의미로 본다면 국가도 사회의 일부분임에는 분명해 보인다.

각종 시민단체나 비정부기구의 활성화로 제도화되지 않은 공동체의 건전한 미래를 구상하기 위한 개별 구성원인 개인들의 연대들이 있고, 이를 제도적으로 지원하기 위한 국가적인 노력들도 있다. 그러나 견해의 차이가 있겠지만 현대 사회에서의 국가의 역할은 개인과 사회의 ‘후원자’로서 자리매김하는 것에 그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한다.

국가가 주도적으로 개인과 사회를 이끌어온 과거의 역사는 전체주의와 군국주의, 권위주의의 이름으로 침략과 환경파괴, 인권침해로 인류의 미래를 오히려 불안하게 만든 주된 원인이 되었다. 전쟁과 같은 예외적 상황을 제외하고 자발적인 지역사회의 공감대형성에 주력하고, 국가는 갈등을 조정하는 ‘조정자’로서의 역할에 만족해야 할 것이다.

지방자치의 전면적 확대와 권력의 분산을 제도적으로 뒷받침해야 할 것이고, 사회 각계 각층의 소통의 통로에 막힘과 굴절이 없도록 모든 언로(言路)를 개방해야 할 것이다. 자유로운 경쟁은 보장하되 공정한 경쟁이 될 수 있도록 어느 정도의 개입도 필요하겠지만, ‘자유에의 개입’은 최소화하되, ‘평등에의 개입’은 넓히는 방향이어야 할 것이다.

그렇게 역사는 최대로 가능한 범위 내의 다수 개인과 제도화되지 않은 사회, 제도화된 국가가 함께 가는 방향이어야 할 것이며, 갈등은 조절하되 소외된 개인과 사회에 대해서도 배려의 손길을 놓지 말아야 할 것이다.

2009년 8월 14일 금요일

[생각] 소통의 의미

언제부턴가 우리 사회의 화두로 ‘소통’이라는 단어가 크게 부각되기 시작하였다. ‘소통’이 문제가 된다는 것은 그만큼 소통의 부재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답답한 가슴을 안고 살아간다는 반증이기도 할 것이다.

그렇다면 ‘소통(疎通)’이란 과연 어떠한 의미를 갖는 것일까?

사전적으로는 ‘어떠한 것이 막히지 않고 잘 통한다’는 의미를 가진 단어라고 한다. 소통의 주체가 사물일 경우에는 배관의 막힘이 없는 것과 같은 시원함을 말할 것이고, 생명체의 경우는 생존을 위한 신호의 전달을, 사람의 경우에는 더 나아가 제대로 된 의미의 전달을 포함하는 것이리라.

또한 소통의 목적은 파멸과 분쟁을 사전에 방지하기 위한 예방의 의미를 가진 것이기도 하다. 배관이 막히면 누수가 생겨 결국에는 시설의 파열을 가져 올 것이고, 상호간의 소통이 부재인 사회에서는 갈등이 쌓여 분열과 투쟁의 씨앗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소통(疎通)’이란 과연 어떠한 방법으로 하는 것이 바람직한 것일까?

최근의 우리 사회의 일련의 문제들을 보면 일방에서는 ‘소통’을 이야기 하고, 다른 일방에서는 ‘소통의 부재’를 이야기 한다. 서로가 ‘소통’이 중요하다고 인식은 하지만 상대방의 입장에서 바라볼 때는 그러한 ‘소통’이 ‘소통의 방식’으로 받아들여지지 않는 것이다.

물론 개인의 기질과 특성, 환경에 따라 소통의 방법도 다양할 것이다. 최근의 인터넷 환경에서 많은 관심을 끌고 있는 트위터와 같은 포괄적 다수(불특정 다수와 특정 다수의 중간적 의미)를 상대로 한 실시간 소통의 방식도 있을 수 있고, 블로깅과 댓글을 통한 소통의 방식도 모두 의미있는 방식들이라고 생각한다.

또 어떤 사람들은 삶의 현장에서, 광장에서, 거리에서 시위를 하기도 하고, 토론과 연구를 하기도 하고, 글과 그림으로 또는 음악으로 자신들의 생각을 제대로 전달하기 위한 다양한 노력들을 한다. 그것은 사상과 학문, 표현의 자유로서 헌법으로 보장된 기본적 인권이기도 하다.

그러나 문제는 ‘소통’과 ‘배설’을 구별하지 못하는 일부 무지몽매한 사람들의 행태가 의지를 가진 다수 사람들의 소통을 왜곡하는 데 있다고 할 것이다. ‘소통’과 ‘배설’의 근본적인 차이는 전자가 상대방에 대한 배려심을 바탕으로 하는 쌍방향성을 갖는 것이라면, 후자는 일방적인 개인적 욕망의 방출이상의 의미가 될 수 없다는 것이다.

소통하고자 하지만 다수에게 본래의 의미대로 전달되고 있지 않다면 스스로가 설정하고 있는 소통의 기준이 나름대로 객관적인 합리성과 충분한 포괄성을 가진 것인가를 되돌아 볼 필요가 있다. 그러나 합리성이라는 것이 증명될 수 있는 이성적 경험이 아니기 때문에 타인의 ‘배설’도 그 자체를 막는 것은 곤란하다.

극단적으로 역설적이긴 하지만 ‘배설’이 자양분의 역할을 하기도 하고, 일상은 늘 ‘배설’과 함께한다. 따라서 길은 늘 열려 있어야 하며, 누구든지 접근할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을 주관적인 ‘개인의 선의’ 와 검증되지 않은 ‘객관적 합리성’이라는 이름으로 애당초 접근 자체를 제도하기 시작한다면 또 누군가는 그와 같은 이름으로 통제를 합리화할 것이기 때문이다.

참된 의미의 소통이 ‘진정한 의미의 배려심 있는 전달’이라고 생각은 하지만, 나에게 찾아오는 그런 선의들을 위하여 어느 정도의 ‘배설’들은 감수하여야 할 부분은 있을 것이고, 감수의 방법은 ‘일단은 들어보고 공감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정리하는’ 방식이어야 할 것이다. 나와 다른 가치와 의견도 받아들이려는 ‘배려’가 소통의 기초이기 때문이다.

자신의 기준에 부합하지 않는 얼토당토 않은 말들은 처음부터 아예 들어보려고 하지도 않으려는 태도 자체가 더 큰 오류의 시작이고 비극의 씨앗일 수도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서로 다른 가치와 의견이 소통의 전제이며, 서로의 차이를 인정하는 것이 진정한 소통의 첫 걸음일 것이다.

무엇이 서로 다른 부분인가를 알기 위해서는 먼저 길 위에 자신의 생각과 의견들을 늘어 놓아야 하지 않겠는가. 사람의 수만큼이나 각자의 생각들은 다를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도 다양성을 훼손하는 자본의 미디어독과점은 제도적으로 규제되어야 한다. ‘사상의 시장’에서는 ‘의견의 자유’가 ‘자본의 자유’에 우선하는 것이 헌법정신일 것이다.

과거의 획일주의가 성장일변도의 시대에서는 경쟁력이었던 부분도 있었겠지만, 이제 세계는 다양성이 경쟁력인 시대로 접어들었다. 각양 각색의 의견들이 창의력을 바탕으로 세계의 정신을 주도하기 위해서는 소통의 길도 여러 갈래여야 하고, 폭도 그만큼 넓어져야 한다. ‘자본의 자유’보다는 ‘사상의 자유’가 더 중요한 또 하나의 이유이기도 하다.

소통의 강은 늘 경계를 흐른다. 이 편과 저 편은 그 사이의 강을 경계로 나누어져 있다. 그러나 강은 양 쪽을 모두 끌어안고 바다로 간다. 한 때는 좌로, 또 한 때는 우로 기울어져 흐르기도 하지만 강은 바다로 가는 길을 멈추지 않는다. 소통의 폭이 넓을수록 바다는 그만큼 가깝게 있다.

2009년 8월 6일 목요일

[생각] 가장 한국적인 것의 위대함


요즘 언론을 오르내리는 화두 중의 하나로 한국 음식의 세계화에 관심을 두고 있는 것을 본 적이 있다. 이는 비단 음식문화에 국한한 것이 아니라 정치, 사회, 경제의 모든 방면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로 노력해야 할 일이지만, 여전히 한국적인 것의 위대함을 인정받기 위해서는 공통적으로 가야할 길이 아득한 듯하다.


현대 사회의 모든 생활영역은 예전보다 서로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어 어느 한 분야의 낙후성이 다른 분야의 성과까지 평가절하시키는 상호 의존도가 훨씬 커졌다고 생각된다. 세상 사람들이 한국을 인식하는 정도도 보다 광범위해졌고, 또 평가수준도 이견이 있을 수 있겠지만 참여정부시절까지는 최소한 정치적인 영역에서는 점진적인 상승곡선을 이어왔다고 본다.


그런데 참여정부이후 MB정부에서는 안경환 국가인권위원회위원장의 ‘정권은 짧고 인권은 길다’라는 기전 퇴임발언에서도 볼 수 있듯이 정치적인 영역에서의 여러 상황은 이미 경고등이 켜진지 오래다. 인권은 인간생활의 본질적인 영역에 관한 문제이므로 역사적인 평가에서도 가장 엄격한 기준으로 평가될 것이다.


과연 정치적인 영역에서 가장 한국적인 것이란 어떤 의미를 가지는 것인가. 이는 역사적으로 가장 한국적인 것의 이름으로 지나치게 한국적 특수성만을 강조하여 독재권력을 합리화하는 수단으로 악용되어 온 점이 없지 않지만, 엄격한 보편성의 기준에 바탕을 두되 민족적 정서나 해방이후의 특수한 역사적 과정도 전혀 배제할 수만은 없을 것이다.


그 예로는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겠지만 불교적 정신세계와 유교적 생활양식의 뿌리, 제국주의 식민지지배와 외세에 의한 해방, 그리고 성장중심의 지나친 불균형전략의 선택 등이 우리의 한국적 특수성의 개략적인 조건들이라 할 수 있을 것으로 본다. 그러나 본질은 역시 ‘먹고 사는 문제’.


‘뚝배기보다는 장맛’이라는 옛말이 있지만 그러한 특수성들을 고려하더라도, 오늘은 장맛을 기본으로 하고 ‘뚝배기도 장맛을 살리는 시대’에 살고 있다. 민주주의가 후퇴하고 국제인권단체들의 인권훼손에 대한 우려가 나오면 나올수록, 지금의 정부가 그렇게 강조하고 있는 글로벌화된 시장에서도 국가브랜드이미지에 치명적인 손상이 된다고 생각된다.


‘광장은 있어도 토론할 수 없는 나라’에서 아무리 좋은 휴대폰을 만들어 본들 소통할 수 없다면 스스로의 한계를 갖는 일이 아닌가. 비록 경제적인 지표들은 긍정적 신호들의 강세로 나타나고 있다고 하지만, 한국은행총재의 우려대로 부동산시장을 중심으로 한 지나친 물가상승으로 인한 인플레이션의 위험 등의 불안요소도 여전히 상존하고 있다.


따라서 지금의 시점에 정치적인 영역에서 ‘가장 한국적인 것의 위대함’을 살리는 길은 바로 좌우와 중도강화 등의 전술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숙성된 장맛’처럼 녹여내는 펄펄끓는 ‘뚝배기전략’이 필요한 시점이다. 다시 계급장 떼고 맞붙을 정도의 의지와 진정성에는 미치지 않더라도 인내하고 참아왔던 소외된 선의들의 양념을 ‘포용과 배려’의 손길로 확실한 버무림이 필요한 시점이다.


부자에 대한 감세와 서민에 대한 세부담의 증가, 특히 술, 담배에 대한 증세에 덧붙여 ‘죄악세’의 논란까지 가세하는 현실을 보면서 녹색성장이란 과연 ‘누구의 무엇을 위한 녹색인지’, ‘그것이 진정 녹색일 것인지’에 대한 의문이 점점 커지기 때문이기도 하다.




[생각] 중도실용의 자리매김


오늘날 인간의 삶은 너무나 다양한 방식으로 전개되고 있다. 이것이 진정 ‘역사의 진보’인가의 문제는 능력의 한계로 논외로 하고, 정치적인 생활양식의 선택에 대한 영향력은 분명 점점 커지고 있는 것이 현실인 것 같다.


최선은 아니지만 차선의 제도로 대부분의 국가에서 채택하고 있는 민주주의라는 것도 사실은 각자의 생활양식에 대한 정치적인 영역에 있어서 어떤 대안에 대한 선택의 결과 중의 하나임에는 분명해 보인다.


이른바 보수와 진보의 다툼이라는 것도 역사적인 배경과는 별개로 인류의 태초의 역사와 더불어 삶의 생활양식을 선택하는 데 있어 그 무게중심을 어디에 둘 것인가의 관점에 따라 계속되고 있는 대화의 방식 중 하나로 이해된다.


그 대화의 방법이 과격해질 경우에는 지나친 피의 대가를 치르기도 하였지만, 그래도 오랫동안 투쟁해 온 결과 이른바 정치 선진국들에서는 비록 싸움은 계속되고 있지만 좀 더 세련된 형태로, 보다 진화된 모습으로 진행되고 있는 듯이 보인다.


이명박대통령이 이른바 ‘중도실용’을 강조함으로써 많은 논란을 야기하고 있다. 최근의 하락한 지지율을 의식한 탓인지, 지나치게 보수편향적이라는 일각의 평가에 대한 나름대로 일단의 고민의 결과로 보인다.


이를 두고 보수진영은 보수진영대로, 진보진영은 진보진영대로 각자의 해석을 덧붙여 비판적인 다양한 의견들을 내놓고 있다. 그 배경은 대통령도 직접 언급하였듯이 행동으로 보여야 할 ‘중도실용’의 진정성에 대한 의문 때문일 것이다.


일례로 국회에서는 이미 2년 전 입법당시부터 예견된 비정규직에 대한 무대책으로 여야의 격심한 논란이 있고, 정부는 천문학적인 예산이 투입되면서도 그 효과에 대해서는 장담할 수 없는 4대강 정비사업을 그대로 밀어붙이고 있다.


많은 문제들을 차치하고, 우선 이 두가지 문제에서만 개략적으로 살펴보면 과연 어느 정도의 입장이 대통령이 말하는 ‘중도실용’에의 길이 될 것인가.


비정규직을 2년 또는 3년 더 연장하여 불안한 노동환경을 노동시장의 유연성이라는 이름으로 밀어붙일 것인가. 아니면 기업과 정부가 다소간의 부담을 안게 되더라도 사회안전망 확보의 차원에서 정규직전환의 입법을 유지할 것인가.


수십조원의 예산을 투입하여 환경오염에 대한 많은 우려가 있음에도 충분한 사회적 합의없이 밀어붙일 정도로 물관리가 시급한 문제인가. 아니면 그보다 훨씬 적은 비용으로도 구제가능한 소외계층에 대한 지원을 통한 사회서비스일자리 창출이 더 유용할 것인가.


결국은 보수냐, 진보냐의 뜬 구름을 잡을 문제가 아니라, 바로 지금 많은 국민들이 먹고 살기 위해서 당장에 시급하게 요구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가에 대한 진심어린 고민만이 ‘중도실용’의 제대로 된 자리매김을 하게 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더불어 국회는 싸우기 위한 곳이므로, 싸우지 않는 국회는 무용지물이다. 가치와 이익을 위해 싸우되 누구의 무엇을 위해서 싸우는 것인지는 분명해야 하고, 좀 더 세련되고 폼나게 싸우는 법은 지속적으로 실험되고 연구되어야 할 과제일 것이다.


그 희미한 길 위에서나마 대다수가 동의하는 ‘중도실용’의 노선이 상처투성이의 마음과 몸을 이어붙여 겨우 지탱하면서도 진정한 몸부림으로 앞으로 나아간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면 국민의 선택이 심판이 되지는 않을 것이라고 본다.




2009년 7월 29일 수요일

[생각] 인간답게 죽을 권리




이른바 ‘존엄사’와 관련하여 각자의 개인은 ‘인간답게 살 권리’에 대응하여 ‘인간답게 죽을 권리’도 당연히 갖는 것인가에 대하여 많은 논란이 되고 있다.

사회의 쟁점이 되게 한 김할머니는 생명유지장치(인공호흡기 등)를 제거하기만 하면 바로 사망할 것이라는 당초 예측과는 달리 불안하지만 지속적인 생명활동을 지속하고 있어 ‘회복불가능한 사망의 단계’ 판단과 관련한 문제를 더욱 심각하게 고민하게 한다.

대법원의 입장도 곤혹스럽기는 마찬가지인 듯하다. 그러나 불필요한 연명장치를 제거하라는 것이지 사망에 이르게 하라는 것이 법원의 입장이 아닌만큼 김할머니가 사망하는 것이 판결에 부합하는 결과는 아니고, 판결의 핵심은 치료중단의 의사를 추정하여, 그 추정된 의사에 따라 불필요한 치료를 중단할 수 있다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인간의 생명은 스스로의 권리로서 타고나는 것이 아니라 절대적으로 주어지는 것이므로 자신을 포함하여 어느 누구도 생명을 말살할 권리는 없다. 다만 생명의 주체인 개인의 자살을 처벌할 수는 없는 것이므로 형법적 판단으로 부터는 자유로운 영역이지만, 타인의 자살에 관여하여 이를 교사하거나 방조한 자는 처벌하고 있는 것이 또한 현실이다.

문제는 현재의 의학수준으로는 생존의 가능성이 없고, 죽음의 시기가 임박한 개인에 대하여 어떤 조건하에 어떤 방식으로 스스로 인간답게 죽을 권리를 선택한 것으로 인정하게 할 것인가에 있다.

대법원의 다수의견은 환자가 ‘회복 불가능한 사망의 단계’(의식의 회복가능성이 없고, 생명과 관련된 중요한 생체기능의 상실을 회복할 수 없으며, 환자의 신체 상태에 비추어 짧은 시간 내에 사망에 이를 수 있음이 명백한 경우)에 진입한 후에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 및 행복추구권과 개인의 인격권에 기초한 자기결정권을 행사한 것으로 인정되는 경우에는 연명치료의 중단이 허용될 수 있고, 이러한 자기결정권은 우선 진정한 자기결정권의 행사로 볼 수 있을 정도의 요건을 갖춘 서면 등에 의한 ‘사전의료지시’(환자가 회복 불가능한 사망의 단계에 이르렀을 경우에 대비하여 미리 의료인에게 자신의 연명치료 거부 내지 중단에 대한 의사를 밝힌 경우)의 방법으로 행사할 수 있으며, 그것이 없는 경우에는 환자의 ‘추정적 의사’에 의해서도 연명치료 중단이 허용될 수 있다고 하고 있다.

이에 대하여 연명치료의 중단을 환자의 자기결정권에 의하여 정당화하는 한 ‘추정적 의사’란 환자가 현실적으로 가지는 의사가 객관적인 정황으로부터 추단될 수 있는 ‘묵시적 의사’의 경우에만 긍정될 수 있으며, 다수의견이 말하는 바와 같은 ‘가정적 의사’만으로는 인정할 수 없다는 반대의견과,

생명에 직결되는 진료에 있어서 환자의 자기결정권은 소극적으로 그 진료 내지 치료를 거부하는 방법으로는 행사될 수 있어도 이미 환자의 신체에 삽입, 장착되어 있는 인공호흡기 등의 생명유지장치를 제거하는 방법으로 치료를 중단하는 것과 같이 적극적인 방법으로 행사되는 것은 ‘돌이킬 수 없는 사망의 과정’에 진입한 경우가 아니면 허용되지 않는다는 반대의견,

이미 사망의 단계에 진입하였고 그 단계에서 회복될 수 없는 환자에게 신체를 침해하면서 행하여지는 진료는 의학적으로 무의미하다고 판단하는 것이 사회상규에 부합하여 자살로 평가할 수는 없는 것이라는 보충의견,

연명치료의 중단이 허용되는지 여부에 관한 판단이 실효성있는 법적 절차에 의하여 신중하면서도 적절한 시기에 내려지게 함으로써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라는 중대한 기본권침해에 대한 구제절차가 유효적절한 방법으로 이루어질 수 있도록 할 필요가 있다는 별개의견이 있었다.

인간은 스스로 죽을 권리는 없겠지만, 의식이 남아있는 상태에서는 불치의 질병으로 고통받는 개인의 의사를 존중하여 스스로 남은 삶의 방식을 결정하는 ‘인간답게 죽을 권리’, 이른바 ‘존엄사’는 죽음도 남아있는 생의 제한된 범위에서는 개인적 삶의 한 방식일 것이므로 이는 ‘인간답게 살 권리’와 마찬가지로 엄격한 조건하에 이를 인정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생각한다.

다만, 김할머니의 경우처럼 추정적의사에 따라 판단해야 할 의식불명의 상태에서 연명치료의 중단이란 행위의 측면에서 보면 적극적으로, 생명의 단축이라는 효과의 면에서는 소극적으로 ‘안락사’에 다름아닌 경우에서는 회복불가능한 사망단계와 추정적 의사의 판단, 연명치료중단수단의 정도와 관련하여서는 좀 더 신중한 고민과 제도적 보완이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