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8월 27일 목요일

[생각] 좌우의 좌표


오늘날 우리 정치에서 늘 회자되는 좌우라는 개념의 역사적 출발은 많은 사람들이 구제도에 대한 개혁의 시발점으로 평가하는 프랑스대혁명 당시 입헌군주제 지지세력이었던 의회의 오른 쪽 점유자들과, 새로운 변화를 갈망하며 공화제 지지세력이었던 의회의 왼쪽 점유자들의 자리 위치에서부터 시작한다고 한다.

그리고 이후 나폴레옹의 제정과 일시적 왕정복고를 거쳐 1848년 2월혁명으로 완전히 구제도가 타도됨으로써 오늘날의 자유주의의 모태가 되었으며, 구제도에 대한 대항세력이었던 시민계급이 무산자계급(프롤레타리아)과 유산자계급(부르조아)으로 분리되어 전자는 사회주의 좌파의 세력으로, 후자는 자유주의 우파의 세력으로 이어지는 것으로 흔히 묘사되고 있다.

또한 그 이후로도 각 지역의 시대상황과 이해관계에 따라 현대 정치사의 새로운 화두인 신자유주의에 이르기까지 분열과 연대는 줄곧 있어 왔다. 우리의 현대사에 있어서도 일각에서는 김대중의 국민의 정부를 최초의 좌파정권으로 규정하고, 노무현의 참여정부에 이르기까지를 그 연장선에서 이해하는가 하면, 어떤 사람들은 모두 결과적으로 우파정권이지 좌파정권은 아니라는 입장도 있으며, 각양각색이다.

개인적인 짧은 생각으로는 좌우의 대립은 우리가 역사적으로 규정하고 있는 프랑스혁명의 훨씬 이전부터 존재해왔던 것이며, 오히려 인류의 ‘먹고 사는 문제’(노무현의 고민 중 큰 하나이기도 했던)인 역사와 함께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근원을 따져 자세히 설명할 능력은 없지만 음양의 조화를 통하여 중용의 도를 추구하는 동양의 사상들에게서 더 수월하게 그 뿌리를 찾을 수 있을 것이라고도 본다.

그러므로 역사라는 것도 개인을 떠나서는 생각할 수 없으므로 신채호가 본래 의도한 의미와 같은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그러한 개인으로부터 출발하여 역사를 정의한 ‘아(我)와 비아(非我)와의 투쟁’이라는 표현이 더 적확하다고 보며, 그러한 개인과 사회(비제도화된 권력으로서의 좁은 의미의 사회), 국가 (제도화된 권력으로서의 넓은 의미의 사회) 간의 관계를 어떻게 설정하며, 각자의 역할과 기능을 어떻게 조정할 것인가의 대립으로 요약된다고 할 것이다.

따라서 그 절충적인 산물인 ‘좌파적 자유주의’와 ‘우파적 사회주의’ 등의 용어가 모순이 아니라 현실을 더 정확하게 반영하고 있는 표현들이며, ‘합리적 보수’와 ‘책임있는 진보’는 현재의 위험사회에서 그러한 고민들의 반영이라고 생각한다. 개인과 사회와 국가가 동등한 역사의 원동력이듯이 좌우를 불문하고 모든 가치들은 서로가 다른 지향점을 갖더라도 하나의 공동체 내에서는 동등하게 존중되어야 하는 것이다.

좌파적(진보적) 입장에서는 현실의 부조리와 모순을 강조하여 사회개혁의 입장에서 최대한의 변화를 추구해 나가는 것이고, 우파적(보수적) 입장에서는 현재 있는 그대로의 입장에서 현실유지적 최소한의 변화만을 지향하는 것으로 대강의 정의를 할 수 있을 것이다. 강의 흐름에 비유한다면 진보적 가치는 흐름(변화)을 있는 그대로 존중하는 경향을 가지고, 보수적 가치는 그들만의 댐을 만드는데 집중한다.

주로 대부분의 좌파적(진보적) 사람들은 강의 상류에 사는 사람들이고, 우파적(보수적) 사람들은 주로 강의 하류에 사는 사람들이다. 상류는 상류대로, 하류는 하류대로 그 강을 경계로 또 양분되어 있지만, 모두 같은 바다(인간의 존엄과 가치, 행복추구)를 향하고는 있다. 하류가 바다에 가까이 있다고 해서 그들이 보편적 가치에 더 충실한 것은 아니며, 상류도 또한 하늘(바다와 같은 보편적 가치)에 보다 가까이 있지만 그들만의 승천(가치실현)으로는 대지를 적시지 못한다. 그러므로 진보는 늘 분열하되 어느 지점에서 합류할 것인가를 고민해야 한다.

상류의 사람들은 하류보다 많은 갈래로 나뉘어 분열과 투쟁이 그 속성처럼 되어 있으며, 연속되기 힘든 가는 줄기로 인하여 금새 말라버릴 우려가 있는 취약성으로 말라죽지 않을 정도의 최소한의 복지적 정책과 안전망이 요구되며, 하류의 사람들은 대세를 있는 그대로 유지하여 기득권을 보호하길 선호하므로 대체적으로 간섭받길 싫어한다. 그러므로 양쪽의 균형을 유지하여 강을 연속하여 흐르도록 하기 위해서는 흐름을 이끌어 가는 제도세력의 철학이 중요시되는 것이다.

제도세력의 기반이 좌파적이었든, 우파적이었든 간에 일단 제도적 권력이 되면 스스로 분명한 한계를 가진다. 아무리 좌파적이고 진보적이라고 하더라도 제도로서의 권력은 본질적인 균형지향성 또는 그 밖의 이유로 ‘공동체의 안정’을 전면으로 내세운다. 그러한 ‘안정성추구’가 바로 양날의 칼이 되는 것이며, 같은 공동체의 구성원으로서 비제도화된 세력으로부터 제도에 대한 끊임없는 견제가 요구되는 이유가 되기도 한다. 따라서 진보세력 중에서도 제도화된 진보의 가치와 제도화되지 않은 ‘날진보’의 색깔은 또 다르다.

지배이데올로기로서의 제도에 대한 끊임없는 견제는 지속적인 감시체계와 책임을 물을 수 있는 시스템을 갖추는 일이 급선무다. 과학기술의 발전으로 ‘전자민주주의’의 가능성까지 논의되고 있는 이 즈음에는 국민이 직접 참여하여 투표권으로서 통제할 수 있는 여건들을 최대로 확대시키는 것도 그 한 방법이다. 민주주의도 차선인 마당에 대의제가 최선일 수는 없다. 간접민주주의(선거기회의 확대를 주로 한 참여의 확장)를 기본으로 하되, 직접민주주의의 요소들(국민투표, 국민소환, 국민발안 등)을 확대하는 것이 중요한 의미를 가지는 이유이기도 하다.

결론적으로 좌우의 좌표는 결코 좌우 비례의 직선일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나 비록 곡선으로 일시적 치우침이 있더라도 지향점은 늘 양자의 균형을 향해 가는 것이어야 한다. 내 눈으로 볼 때는 모두가 회색인인 지금 ‘회색인들의 사회’라고 맹목적인 자책과 비난을 할 것이 아니라 회색의 스펙트럼 중에서도 가치를 선택하고 행동의 순서를 정하는 본질에 더 충실하여야 할 것이다.

강은 경계를 따라 흐르지만, 그것은 분열의 진행의 아니라 통합의 과정이며, 그 회색의 물빛이 겉으로 힐끗 보기에는 전부 같은 빛으로 보일지는 몰라도, 스스로의 색깔을 잃지 않고 물들지 않으며 각자의 빛깔로 함께 어울리며 흐르고 있다는 성찰과 자각이 회복불가능한 강의 오염과 고갈을 방지하는 본질일 것이며, 다수의 그런 생각들이 모일 때 물빛은 또한 겉으로도 달리 보일 수 있는 것이리라. ‘먹고 사는’ 문제 중에 어디에 방점을 찍을 것인가에 따라 흐르는 강물의 좌표가 결정된다.

2009년 8월 22일 토요일

[생각] 듣고 말하기와 읽고 쓰기


최근의 기술의 발전과 더불어 한사람이 다른 사람으로부터 듣고, 말하고, 읽고 쓰는 기회가 점차 증가하고 있다. 특히 인터넷의 발전으로 카페나 블로그, 채팅이나 마이크로블로깅 등을 통하여 더더욱 실시간 네트워킹을 통한 소통의 기회가 증가함으로써 ‘1인미디어시대의 시민저널리즘’까지 화두가 되고 있는 현실이다.

이미 대세를 거스르기는 힘든 일로 보이지만, 이러한 문화를 확산시키려는 정부의 의지와 관련 기업의 이해관계 등을 이유로 문화의 확산속도는 일정 부분 조정을 받게 된다. 일례로 통신기업의 이해관계와 맞물려 이미 세계적인 열풍의 주역인 아이폰의 국내도입문제가 늘 문턱을 넘어서지 못하고 머뭇거리고 있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이러한 현실을 지켜보고 있는 관련업계의 종사자들은 더할 나위없는 조급함과 답답함으로 참고 있기 힘든 모양이다. 그 분야에서 세상의 진보를 빨리 내다보고 예측하는 그들의 입장에서 어쩌면 정보문명사회에서 ‘고립된 섬’으로 남겨져 많은 기회들을 놓치게 되지나 않을까하는 진심어린 염려들로 느껴진다.

그들이 걱정하는 동태적 문화와 정태적 문명의 고립도 문제가 되겠지만 더더욱 큰 문제는 ‘개인의 고립’이다. 더욱이 최근의 열풍의 주역인 트위터를 비롯한 마이크로블로깅을 통한 소셜네트워킹이란 것이 새로운 소통의 수단으로 부상하고 있는 즈음에 우리는 또 하나의 시민들의 자연적 권리를 잃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의문이 있다.

‘소통’이란 막힘이 없이 흐르는 것이며, ‘의사의 소통’이란 내심적 의사의 왜곡, 굴절없는 표현이라고 대강의 정의를 한다면(이 세상에서 정의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개인적 입장에서 보면 정의는 곧 오류이기는 하지만) 표현의 자유, 자유로운 접근이용의 자유(Access권) 등의 자연적 자유를 개별기업의 이익을 목적으로 하는 그들의 경제적 자유에 의해 묵살당하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듣고, 말하고, 읽고, 쓰는 행위는 모두 차별없이 인간의 소통을 향한 자유로운 표현의 수단인 것이며 듣고 말하는 것이 본능에 기초한 행위이고, 읽고 말하는 것은 사후적 교육의 결과든, 듣고 읽는 것이 소극적, 수동적 행태이고, 말하고 쓰는 것은 능동적, 적극적 행태라는 구별이 있을지라도 그것들의 총합은 주체적인 개인의 자발적인 의지의 표현이라는 사실에는 다름이 없으므로 본질적 내용들은 제한없이 보장되어야 한다.

듣고, 말하고, 읽고 쓰는 행위는 또한 인간을 가장 인간답게 하는 창조적 지성을 만들어가는 유용한 도구들이다. 가려서 들으면서 그 숨은 의미를 파악하고, 이미 내 뱉은 말도 토론하여 주체적으로 수정하고, 타인의 간접적인 경험들을 통해 행간의 의미들을 읽어내고, 자신의 의지를 기록하는 일련의 과정들은 하늘로부터 물려받은 침해할 수 없는 인간만의 권리임에 틀림없다.

좋은 해몽이 좋은 꿈을 만들고, 좋은 해석이 좋은 법을 만드는 것과 마찬가지로 주어진 제도를 어떻게 활용할 것인가의 문제는 동시대인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주체적인 자각과 실천하는 역량에 달려있는 문제일 것이다. 인간은 듣고, 말하고, 읽고 쓰는 행위를 통한 합리적인 해석의 과정을 거쳐 창조적으로 낡은 제도를 개선하고, 폐기함으로써 새로운 자유를 발견하고 개선된 제도를 구성함으로써 성숙해가는 것이 아닐까 싶다. 그것이 또한 동시대인의 공감대적 가치를 발견해 나가는 필수적인 수단이기도 한 것이다.

귀와 입을 막고, 눈과 손을 가두기에는 듣고, 말하고, 읽고, 쓰려는 강물의 기세는 방향을 틀 수 없을 정도로 분명하고 세계적이다. 세상이 하나로 모이는 바다로 너무 늦지 않게 합류하는 가장 쉬운 길은 큰 줄기를 따르는 것이리라. 국가작용의 편이성이나 기업의 경제적 자유보다는 시민 개개인의 표현의 자유와 일반적 행동의 자유를 우선하는 것이 오늘날의 보편적 가치를 기준으로 볼 때도 합리적임은 분명해 보인다.

2009년 8월 20일 목요일

[생각] 자유와 제도

자유는 제도인가? 자유는 제도가 아닌 것인가? 자유는 제도일 수 밖에 없는 것인가? 자유는 제도와 동행가능한 것인가? 이런 물음에 대한 답은 딱히 그렇다, 아니다라고 일률적으로 이야기할 수는 없고, 역사적으로도 시대상황에 따라 끊임없는 논쟁의 대상이 되어오고 있는 것 같다.

헌법상으로 자유란 다소 견해의 차이가 있긴 하지만 천부인권으로서 그 본질적 내용을 제한할 수는 없는 것이다. 하늘로부터 물려받은 권리이므로 군주나 국가가 은혜적으로 베푸는 것이 아니라 인간으로 태어나는 순간부터 당연히 가지게 되는 자연적인 권리인 것이다.

전통적으로 자유는 제도 권력인 국가에 대항하면서 개인의 운신의 폭을 넓혀온 투쟁의 산물이기도 하다. 국가의 역할도 전체주의, 군국주의, 권위주의시대에는 개인의 적으로서 침탈자로서의 역할에 충실했지만, 민주주의가 사회 전반에 뿌리를 내림으로써 그나마 보호자, 후원자, 조정자로서의 역할이 강조되고 있는 것이다.

내용이 형식을 결정하고 형식이 내용을 결정한다고 하더라도 끊임없는 상호간의 피드백을 통한 소통이 있어야 한다. 자유는 일정부분 제도이더라도 그것이 전부가 아니고, 제도가 아닌 자유의 영역도 끊임없이 개척되고 발견되어어야 하는 것이다.

따라서 자유는 제도와 제도가 아닌 것들을 모두 포괄하는 것이며, 제도로서의 자유는 과거의 정태적인 현상을, 제도가 아닌 자유의 영역은 치열한 현재의 동태적 사실을 규정하는 것으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인간의 존엄과 가치를 바탕으로 행복을 추구하는 수단으로서 민주주의가 더욱 필요한 이유다.

그러므로 보수적 성향의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제도인 자유에 집착하게 될 것이고, 진보적 성향의 사람들은 제도가 아닌 자유의 영역의 개척에 보다 더 주력하게 될 것이다. 그렇게 동시대인의 의견들을 수렴하여 또 하나의 제도를 만들고, 수정하면서 창조적 파괴의 과정을 이어나가는 것이 민주적 삶 아니겠는가.

흐르는 강물에 비유하자면, 제도로서의 자유는 기존의 정해진 물길이며, 제도가 아닌 영역의 자유는 물의 양에 따라 범람을 거듭하며 새롭게 내는 물길이다. 새로운 물길이 일정한 주기로 일상적이 되면 그 또한 제도가 되는 것이고, 바다로 가는 물길은 정해진 하나의 길 외에도 여러 갈래가 있을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런데 그 물길을 콘크리트 장벽으로 둘러치고 나면 가장 큰 문제는 소통의 단절이다. 자연적인 정화과정의 차단으로 지속적으로 인위적인 통제를 필요로 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면 오히려 더 큰 사회적, 경제적 비용을 부담해야 할 것이고, 사후에 잘못을 발견하여 교정하기 위해 노력하더라도 원상회복이 불가능할 수도 있을 것이다.

지도자의 역량이란 큰 줄기를 제대로 세우는 그런 뿌리이면 족하다. 스스로 꽃이 될 것이 아니라 꽃을 피우는 일에 주력해야 하는 것이다. 줄기가 높을수록 뿌리는 더 깊이 암흑 속으로 박혀야 한다. 그것이 보다 많은 자유의 열매를 맺는 일이고, 바다로 가는 진정한 동행인 제도로서의 자유의 진정한 속성일 것이다.

제도는 의식적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자유의 발걸음 아래서 흔적을 남기듯이 자연스럽게 만들어지는 것이다. 본질이 한걸음 나아가면 그림자도 한걸음 나아가는 것과 같은 그런 동행인 것이다. 그러므로 누구도 어떠한 이유로도 자유의 길을 막아서는 안된다.

제도는 정오의 햇살을 마주한 자유의 그늘이다. 구름이 태양을 가리더라도 전부를 침해해서는 안되는 이유이기도 하고, 어둠이 깔리면 운신의 폭도 줄어드는 한계를 가진 것이기도 하다. 그렇더라도 침해할 수 없는 본질은 새벽이 오면 다시 태양이 뜨는 것과 같은 자연과 같은 자유인 것이다.

2009년 8월 19일 수요일

[생각] 문화와 문명

개인과 사회와 국가에 있어 문화란 과연 무엇이며, 문명이란 또한 무엇인가? 정치문화란 무엇을 내용으로 하는 것이며, 정치문화의 수준이란 또 어느 정도의 질적 평가를 전제하는 것인가?

사전적 의미로는 문명이란 ‘물질적으로는 생활이 편리해지고 정신적으로도 발달하여 세상이 진보한 상태’를 의미하고, 문화는 ‘인간이 자연상태에서 벗어나 일정한 목적 또는 생활 이상(理想)을 실현하려는 활동의 과정 및 그 과정에서 이룩한 물질적·정신적 소득의 총칭’을 말하는 것으로 정의하고 있다.

견해에 따라서는 문화의 의미를 문명을 포괄하는 보다 광범위한 것으로 이해하기도 하고, 문화와 문명을 구별없이 같은 뜻으로 함께 혼용하고 있기도 한 것 같다. 위키백과사전에 의하면 에드워드 버네트 타일러는 1871년 그의 사회인류학 저서에서 “문화 또는 문명이란 제 민족의 양식을 고려할 때 한 사회의 구성원이 갖는 법, 도덕, 신념, 예술, 기타 여러 행동 양식을 총괄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에서는 주로 자연과 대립하는 개념으로서, 인간을 제외한 자연은 객관적·필연적으로 생기지만 이러한 자연을 소재로 하여 목적 의식을 지닌 인간의 활동으로 실현되는 과정을 ‘문화’라고 정의한다. 유네스코는 2002년 “문화는 한 사회 또는 사회적 집단에서 나타나는 예술, 문학, 생활양식, 더부살이, 가치관, 전통, 신념 등의 독특한 정신적, 물질적, 지적 특징”으로 정의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문화든 문명이든 간에 각 개인의 생활영역에서 관계로 맺어지는 일정한 공간적, 집단적 특성을 공통분모로 찾아볼 수 있을 것 같다. 개인적인 견해로 볼 때 문화와 문명을 구분짓는 것은 바로 시간적 특성과 연속성여부로 그 차별성을 찾을 수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즉, 인류문명의 발생지로 크게 4대문명을 들고 있는데, 이것을 문명이라고 이름하는 것은 과거 특정한 시기에 특정한 지역에서 특정한 형태로 정의할 수 있는 공통된 생활양식이었던 것이고, 문화란 지금까지도 그러한 생활양식상의 특성들이 명맥을 유지하고 살아있는 현재의 현상을 말하는 것으로 이해한다. 다시말하면 문명이란 고정된 과거의 정태적인 현상인 것이고, 문화는 현재도 진행중인 동태적 특성을 강조하는 개념인 것이다.

정치문화란 그 중에서도 정치적인 생활양식의 특성을 말하는 것이리라. 우리의 정치문화는 역사적으로 볼 때 크게 원시시대의 족정(族政), 고대 왕정(王政), 군국주의하의 제정(帝政), 현재의 공화정(共和政)으로 대강의 분류를 한다면, 다른 생활영역에서의 역사적 문명이란 것은 존재했을지라도 최소한 정치적인 생활영역에서는 과거의 ‘문명’이라고 할만한 것은 없었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군주의 폭정에 항거하거나, 외세에 항거한 역사들이 비록 성공적이지는 못했지만 시대정신으로 살아남아 명맥을 유지하면서 오늘의 헌법상 대한민국의 임시정부의 법통을 이어받은 공화국으로서 계승하여 빛과 어둠을 교차하면서도 민주주의를 점차 폭넓게 실현해가고 있는 현재까지 한(恨)처럼 끈질기게 살아있는 연속적인 정치‘문화’는 있다.

비록 외세에 의해 주어진 미약하고 혼란스러운 갈등과 함께 출발한 민주주의였지만, 절망의 독재를 넘어 문민정부, 국민의 정부로, 권위주의를 넘어 참여정부로 정치적인 진보를 거듭하며, 배부르지는 않았지만 희망을 현실로 한걸음씩 이어갈 수 있었다. 이젠 지나간 시간이지만 누구든지 차별없이 거리낌없이 토로 할 수 있었던 늘 열려있던 광장도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때로는 친구로서, 또 때로는 원망의 대상으로서 민주주의의 자유로움으로 희망을 밝혀 준, 노무현과 김대중 두 분의 전직 대통령이 잇따라 서거하고, 거리의 광장은 하나 둘씩 소통없는 벽으로 막혀간다. 촛불을 켜기도 전에, 목소리를 내기도 전에 사람들의 눈빛과 가슴은 굳디자인의 방패에 쫒겨난다. 죽어도 살아있던 ‘오늘의 문화’들이 ‘어제의 문명’이 되고 있다.

문화는 ‘끊기지 않고 흐르는 강’이다. 문명은 ‘길을 잃은 막힌 호수’다. 바다가 먼 계곡의 상류든, 바다에 가까운 강의 하류든 길을 막는 것은 단절인 것이며, 흐름의 중단은 곧 역사의 퇴보다. 정치문화의 수준을 결정하는 가장 큰 기준은 바로 소통의 폭과 연속성일 것이다. 민주주의를 향한 가능한 모든 길은 열려있어야 한다. 그것이 바다로 가는 가장 빠른 길이다.

비록 전직 대통령의 서거에 대한 관례에 따라 노무현 대통령은 국민장으로 치뤄졌지만, 그 때 닫혔던 광장은 열리는 듯하고, 김대중 대통령의 경우는 비록 6일로 단축되긴 했어도 국장으로 예를 갖춘다고 하니 뒤늦게나마 다행스런 일이다. 때맞춰 북한의 조문단도 방문하여 죽어서까지 평화통일의 염원을 담은 그 분의 뜻을 기린다고 하니 이를 기회로 끊어진 물길들이 다시 이어졌으면 하는 바램을 가진다.

그래서 과거 10여년 동안, 아니 두 분 전직 대통령들의 평생동안 어렵사리 씨를 뿌리고 꽃 피워온 민주주의의 정치문화가 문명도 아닌 채 초라하게 과거의 역사 속으로 사라지지 않고 지속가능한 문화로서 더욱 화려한 부활을 기할 수 있도록 그 분들의 정신을 계승하여 평화적인 조국의 통일도 앞당겨 맞이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싶다.

2009년 8월 18일 화요일

[생각] 개인과 사회와 국가

깊이 있는 논의는 잘 알지 못하지만 창조설에 따르면 아담과 이브 이래로 인간은 사회적 존재였던 것 같다. 진화론에 따르더라도 인간이 동물과 구분되는 단초는 아마도 상호간의 관계의 의미를 존중하기 시작한 때부터가 아닐까싶다.

개별 존재로서 공동체 구성요소로서의 개인과 그러한 개인들의 집합체인 공동체로서의 사회와 국가는 역사의 발전단계와 시대상황에 따라 서로 그 의미와 긴장관계를 달리 한다.

오로지 물리적 힘에 의해서 사회적 계급이 결정되던 원시사회로부터, 종교와 강제적 권위에 의한 특수계급의 힘이 절대적이었던 중세봉건사회, 그리고 비록 부분적으로 시민의 각성이 시작되었으나 자본의 힘이 국력의 대부분을 상징하던 근대 절대주의국가사회를 거쳐, 근로자와 여성에게 까지 참정권이 확대되기 시작하면서 본격적으로 시민의 역할이 중요한 기능을 담당하는 오늘의 현대 사회에 이르게 되었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을 이른바 ‘역사의 진보’라고 평가한다면, 그 진보의 의미는 ‘공동체를 구성하는 다수의 사회적 의사결정과정에서의 참여의 확대’라고 이해된다. 따라서 역사가 진보하기 위해서는 ‘구성원 다수의 참여의 확대’가 전제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개별 사회의 구성요소인 개인이 제도화된 공동체로서의 국가의 의사결정에 참여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오직 투표를 통해서이다. 그런데 현재 우리 제도상으로 보장된 투표권은 공직선거법상의 대통령, 국회의원, 지방자치단체장, 지방의회의원 등의 선거권과 중요정책과 헌법개정에 관한 국민투표권 등을 들 수 있다.

이러한 투표권을 행사함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모두가 동의하지는 않더라도 간접선거보다는 직접선거가 민주적 정당성의 측면에서는 보다 더 강화된 지위를 가진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대통령간선제를 직선제로 바꾼 것이 우리 헌정사의 큰 전환점이 되었듯이 제도적으로 국민참여의 폭과 절차를 대폭 완화해가는 것은 역사의 진보임에 분명하다고 본다.

간접민주주의보다는 직접민주주의가 모든 측면에서 우월적인 제도라고 할 수는 없겠지만, 소통의 단절과 왜곡이라는 대의민주주의의 결함을 예방하기 위한 측면에서는 부분적으로 직접민주주의의 수단들을 보충하여 보다 더 강화해 나갈 필요는 있을 것이다.

직접민주주의는 국민투표, 국민발안, 국민소환 등을 그 주요 내용으로 한다. 그 중 우리의 현실은 국민투표제도만 부분적으로 도입하고 있고, 국민발안과 국민소환제도는 도입하고 있지 않다. 지방자치단체장에 대한 주민소환과 같이 대통령과 국회의원에 대한 국민소환제도의 도입도 향후 개헌논의와 관련하여 심도있게 논의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개인과 사회와 국가는 역사의 동등한 원동력이다. 공동체로서의 사회와 국가는 그것의 제도화 여부에 따라 제도화되지 않은 공동체를 ‘사회’라는 이름으로, 제도화된 공동체는 ‘국가’라는 이름으로 역사를 만들어가고 있으며, 독자적인 역할과 기능을 하고 있다. 물론 넓은 의미로 본다면 국가도 사회의 일부분임에는 분명해 보인다.

각종 시민단체나 비정부기구의 활성화로 제도화되지 않은 공동체의 건전한 미래를 구상하기 위한 개별 구성원인 개인들의 연대들이 있고, 이를 제도적으로 지원하기 위한 국가적인 노력들도 있다. 그러나 견해의 차이가 있겠지만 현대 사회에서의 국가의 역할은 개인과 사회의 ‘후원자’로서 자리매김하는 것에 그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한다.

국가가 주도적으로 개인과 사회를 이끌어온 과거의 역사는 전체주의와 군국주의, 권위주의의 이름으로 침략과 환경파괴, 인권침해로 인류의 미래를 오히려 불안하게 만든 주된 원인이 되었다. 전쟁과 같은 예외적 상황을 제외하고 자발적인 지역사회의 공감대형성에 주력하고, 국가는 갈등을 조정하는 ‘조정자’로서의 역할에 만족해야 할 것이다.

지방자치의 전면적 확대와 권력의 분산을 제도적으로 뒷받침해야 할 것이고, 사회 각계 각층의 소통의 통로에 막힘과 굴절이 없도록 모든 언로(言路)를 개방해야 할 것이다. 자유로운 경쟁은 보장하되 공정한 경쟁이 될 수 있도록 어느 정도의 개입도 필요하겠지만, ‘자유에의 개입’은 최소화하되, ‘평등에의 개입’은 넓히는 방향이어야 할 것이다.

그렇게 역사는 최대로 가능한 범위 내의 다수 개인과 제도화되지 않은 사회, 제도화된 국가가 함께 가는 방향이어야 할 것이며, 갈등은 조절하되 소외된 개인과 사회에 대해서도 배려의 손길을 놓지 말아야 할 것이다.

2009년 8월 14일 금요일

[생각] 소통의 의미

언제부턴가 우리 사회의 화두로 ‘소통’이라는 단어가 크게 부각되기 시작하였다. ‘소통’이 문제가 된다는 것은 그만큼 소통의 부재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답답한 가슴을 안고 살아간다는 반증이기도 할 것이다.

그렇다면 ‘소통(疎通)’이란 과연 어떠한 의미를 갖는 것일까?

사전적으로는 ‘어떠한 것이 막히지 않고 잘 통한다’는 의미를 가진 단어라고 한다. 소통의 주체가 사물일 경우에는 배관의 막힘이 없는 것과 같은 시원함을 말할 것이고, 생명체의 경우는 생존을 위한 신호의 전달을, 사람의 경우에는 더 나아가 제대로 된 의미의 전달을 포함하는 것이리라.

또한 소통의 목적은 파멸과 분쟁을 사전에 방지하기 위한 예방의 의미를 가진 것이기도 하다. 배관이 막히면 누수가 생겨 결국에는 시설의 파열을 가져 올 것이고, 상호간의 소통이 부재인 사회에서는 갈등이 쌓여 분열과 투쟁의 씨앗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소통(疎通)’이란 과연 어떠한 방법으로 하는 것이 바람직한 것일까?

최근의 우리 사회의 일련의 문제들을 보면 일방에서는 ‘소통’을 이야기 하고, 다른 일방에서는 ‘소통의 부재’를 이야기 한다. 서로가 ‘소통’이 중요하다고 인식은 하지만 상대방의 입장에서 바라볼 때는 그러한 ‘소통’이 ‘소통의 방식’으로 받아들여지지 않는 것이다.

물론 개인의 기질과 특성, 환경에 따라 소통의 방법도 다양할 것이다. 최근의 인터넷 환경에서 많은 관심을 끌고 있는 트위터와 같은 포괄적 다수(불특정 다수와 특정 다수의 중간적 의미)를 상대로 한 실시간 소통의 방식도 있을 수 있고, 블로깅과 댓글을 통한 소통의 방식도 모두 의미있는 방식들이라고 생각한다.

또 어떤 사람들은 삶의 현장에서, 광장에서, 거리에서 시위를 하기도 하고, 토론과 연구를 하기도 하고, 글과 그림으로 또는 음악으로 자신들의 생각을 제대로 전달하기 위한 다양한 노력들을 한다. 그것은 사상과 학문, 표현의 자유로서 헌법으로 보장된 기본적 인권이기도 하다.

그러나 문제는 ‘소통’과 ‘배설’을 구별하지 못하는 일부 무지몽매한 사람들의 행태가 의지를 가진 다수 사람들의 소통을 왜곡하는 데 있다고 할 것이다. ‘소통’과 ‘배설’의 근본적인 차이는 전자가 상대방에 대한 배려심을 바탕으로 하는 쌍방향성을 갖는 것이라면, 후자는 일방적인 개인적 욕망의 방출이상의 의미가 될 수 없다는 것이다.

소통하고자 하지만 다수에게 본래의 의미대로 전달되고 있지 않다면 스스로가 설정하고 있는 소통의 기준이 나름대로 객관적인 합리성과 충분한 포괄성을 가진 것인가를 되돌아 볼 필요가 있다. 그러나 합리성이라는 것이 증명될 수 있는 이성적 경험이 아니기 때문에 타인의 ‘배설’도 그 자체를 막는 것은 곤란하다.

극단적으로 역설적이긴 하지만 ‘배설’이 자양분의 역할을 하기도 하고, 일상은 늘 ‘배설’과 함께한다. 따라서 길은 늘 열려 있어야 하며, 누구든지 접근할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을 주관적인 ‘개인의 선의’ 와 검증되지 않은 ‘객관적 합리성’이라는 이름으로 애당초 접근 자체를 제도하기 시작한다면 또 누군가는 그와 같은 이름으로 통제를 합리화할 것이기 때문이다.

참된 의미의 소통이 ‘진정한 의미의 배려심 있는 전달’이라고 생각은 하지만, 나에게 찾아오는 그런 선의들을 위하여 어느 정도의 ‘배설’들은 감수하여야 할 부분은 있을 것이고, 감수의 방법은 ‘일단은 들어보고 공감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정리하는’ 방식이어야 할 것이다. 나와 다른 가치와 의견도 받아들이려는 ‘배려’가 소통의 기초이기 때문이다.

자신의 기준에 부합하지 않는 얼토당토 않은 말들은 처음부터 아예 들어보려고 하지도 않으려는 태도 자체가 더 큰 오류의 시작이고 비극의 씨앗일 수도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서로 다른 가치와 의견이 소통의 전제이며, 서로의 차이를 인정하는 것이 진정한 소통의 첫 걸음일 것이다.

무엇이 서로 다른 부분인가를 알기 위해서는 먼저 길 위에 자신의 생각과 의견들을 늘어 놓아야 하지 않겠는가. 사람의 수만큼이나 각자의 생각들은 다를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도 다양성을 훼손하는 자본의 미디어독과점은 제도적으로 규제되어야 한다. ‘사상의 시장’에서는 ‘의견의 자유’가 ‘자본의 자유’에 우선하는 것이 헌법정신일 것이다.

과거의 획일주의가 성장일변도의 시대에서는 경쟁력이었던 부분도 있었겠지만, 이제 세계는 다양성이 경쟁력인 시대로 접어들었다. 각양 각색의 의견들이 창의력을 바탕으로 세계의 정신을 주도하기 위해서는 소통의 길도 여러 갈래여야 하고, 폭도 그만큼 넓어져야 한다. ‘자본의 자유’보다는 ‘사상의 자유’가 더 중요한 또 하나의 이유이기도 하다.

소통의 강은 늘 경계를 흐른다. 이 편과 저 편은 그 사이의 강을 경계로 나누어져 있다. 그러나 강은 양 쪽을 모두 끌어안고 바다로 간다. 한 때는 좌로, 또 한 때는 우로 기울어져 흐르기도 하지만 강은 바다로 가는 길을 멈추지 않는다. 소통의 폭이 넓을수록 바다는 그만큼 가깝게 있다.

2009년 8월 6일 목요일

[생각] 가장 한국적인 것의 위대함


요즘 언론을 오르내리는 화두 중의 하나로 한국 음식의 세계화에 관심을 두고 있는 것을 본 적이 있다. 이는 비단 음식문화에 국한한 것이 아니라 정치, 사회, 경제의 모든 방면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로 노력해야 할 일이지만, 여전히 한국적인 것의 위대함을 인정받기 위해서는 공통적으로 가야할 길이 아득한 듯하다.


현대 사회의 모든 생활영역은 예전보다 서로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어 어느 한 분야의 낙후성이 다른 분야의 성과까지 평가절하시키는 상호 의존도가 훨씬 커졌다고 생각된다. 세상 사람들이 한국을 인식하는 정도도 보다 광범위해졌고, 또 평가수준도 이견이 있을 수 있겠지만 참여정부시절까지는 최소한 정치적인 영역에서는 점진적인 상승곡선을 이어왔다고 본다.


그런데 참여정부이후 MB정부에서는 안경환 국가인권위원회위원장의 ‘정권은 짧고 인권은 길다’라는 기전 퇴임발언에서도 볼 수 있듯이 정치적인 영역에서의 여러 상황은 이미 경고등이 켜진지 오래다. 인권은 인간생활의 본질적인 영역에 관한 문제이므로 역사적인 평가에서도 가장 엄격한 기준으로 평가될 것이다.


과연 정치적인 영역에서 가장 한국적인 것이란 어떤 의미를 가지는 것인가. 이는 역사적으로 가장 한국적인 것의 이름으로 지나치게 한국적 특수성만을 강조하여 독재권력을 합리화하는 수단으로 악용되어 온 점이 없지 않지만, 엄격한 보편성의 기준에 바탕을 두되 민족적 정서나 해방이후의 특수한 역사적 과정도 전혀 배제할 수만은 없을 것이다.


그 예로는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겠지만 불교적 정신세계와 유교적 생활양식의 뿌리, 제국주의 식민지지배와 외세에 의한 해방, 그리고 성장중심의 지나친 불균형전략의 선택 등이 우리의 한국적 특수성의 개략적인 조건들이라 할 수 있을 것으로 본다. 그러나 본질은 역시 ‘먹고 사는 문제’.


‘뚝배기보다는 장맛’이라는 옛말이 있지만 그러한 특수성들을 고려하더라도, 오늘은 장맛을 기본으로 하고 ‘뚝배기도 장맛을 살리는 시대’에 살고 있다. 민주주의가 후퇴하고 국제인권단체들의 인권훼손에 대한 우려가 나오면 나올수록, 지금의 정부가 그렇게 강조하고 있는 글로벌화된 시장에서도 국가브랜드이미지에 치명적인 손상이 된다고 생각된다.


‘광장은 있어도 토론할 수 없는 나라’에서 아무리 좋은 휴대폰을 만들어 본들 소통할 수 없다면 스스로의 한계를 갖는 일이 아닌가. 비록 경제적인 지표들은 긍정적 신호들의 강세로 나타나고 있다고 하지만, 한국은행총재의 우려대로 부동산시장을 중심으로 한 지나친 물가상승으로 인한 인플레이션의 위험 등의 불안요소도 여전히 상존하고 있다.


따라서 지금의 시점에 정치적인 영역에서 ‘가장 한국적인 것의 위대함’을 살리는 길은 바로 좌우와 중도강화 등의 전술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숙성된 장맛’처럼 녹여내는 펄펄끓는 ‘뚝배기전략’이 필요한 시점이다. 다시 계급장 떼고 맞붙을 정도의 의지와 진정성에는 미치지 않더라도 인내하고 참아왔던 소외된 선의들의 양념을 ‘포용과 배려’의 손길로 확실한 버무림이 필요한 시점이다.


부자에 대한 감세와 서민에 대한 세부담의 증가, 특히 술, 담배에 대한 증세에 덧붙여 ‘죄악세’의 논란까지 가세하는 현실을 보면서 녹색성장이란 과연 ‘누구의 무엇을 위한 녹색인지’, ‘그것이 진정 녹색일 것인지’에 대한 의문이 점점 커지기 때문이기도 하다.




[생각] 중도실용의 자리매김


오늘날 인간의 삶은 너무나 다양한 방식으로 전개되고 있다. 이것이 진정 ‘역사의 진보’인가의 문제는 능력의 한계로 논외로 하고, 정치적인 생활양식의 선택에 대한 영향력은 분명 점점 커지고 있는 것이 현실인 것 같다.


최선은 아니지만 차선의 제도로 대부분의 국가에서 채택하고 있는 민주주의라는 것도 사실은 각자의 생활양식에 대한 정치적인 영역에 있어서 어떤 대안에 대한 선택의 결과 중의 하나임에는 분명해 보인다.


이른바 보수와 진보의 다툼이라는 것도 역사적인 배경과는 별개로 인류의 태초의 역사와 더불어 삶의 생활양식을 선택하는 데 있어 그 무게중심을 어디에 둘 것인가의 관점에 따라 계속되고 있는 대화의 방식 중 하나로 이해된다.


그 대화의 방법이 과격해질 경우에는 지나친 피의 대가를 치르기도 하였지만, 그래도 오랫동안 투쟁해 온 결과 이른바 정치 선진국들에서는 비록 싸움은 계속되고 있지만 좀 더 세련된 형태로, 보다 진화된 모습으로 진행되고 있는 듯이 보인다.


이명박대통령이 이른바 ‘중도실용’을 강조함으로써 많은 논란을 야기하고 있다. 최근의 하락한 지지율을 의식한 탓인지, 지나치게 보수편향적이라는 일각의 평가에 대한 나름대로 일단의 고민의 결과로 보인다.


이를 두고 보수진영은 보수진영대로, 진보진영은 진보진영대로 각자의 해석을 덧붙여 비판적인 다양한 의견들을 내놓고 있다. 그 배경은 대통령도 직접 언급하였듯이 행동으로 보여야 할 ‘중도실용’의 진정성에 대한 의문 때문일 것이다.


일례로 국회에서는 이미 2년 전 입법당시부터 예견된 비정규직에 대한 무대책으로 여야의 격심한 논란이 있고, 정부는 천문학적인 예산이 투입되면서도 그 효과에 대해서는 장담할 수 없는 4대강 정비사업을 그대로 밀어붙이고 있다.


많은 문제들을 차치하고, 우선 이 두가지 문제에서만 개략적으로 살펴보면 과연 어느 정도의 입장이 대통령이 말하는 ‘중도실용’에의 길이 될 것인가.


비정규직을 2년 또는 3년 더 연장하여 불안한 노동환경을 노동시장의 유연성이라는 이름으로 밀어붙일 것인가. 아니면 기업과 정부가 다소간의 부담을 안게 되더라도 사회안전망 확보의 차원에서 정규직전환의 입법을 유지할 것인가.


수십조원의 예산을 투입하여 환경오염에 대한 많은 우려가 있음에도 충분한 사회적 합의없이 밀어붙일 정도로 물관리가 시급한 문제인가. 아니면 그보다 훨씬 적은 비용으로도 구제가능한 소외계층에 대한 지원을 통한 사회서비스일자리 창출이 더 유용할 것인가.


결국은 보수냐, 진보냐의 뜬 구름을 잡을 문제가 아니라, 바로 지금 많은 국민들이 먹고 살기 위해서 당장에 시급하게 요구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가에 대한 진심어린 고민만이 ‘중도실용’의 제대로 된 자리매김을 하게 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더불어 국회는 싸우기 위한 곳이므로, 싸우지 않는 국회는 무용지물이다. 가치와 이익을 위해 싸우되 누구의 무엇을 위해서 싸우는 것인지는 분명해야 하고, 좀 더 세련되고 폼나게 싸우는 법은 지속적으로 실험되고 연구되어야 할 과제일 것이다.


그 희미한 길 위에서나마 대다수가 동의하는 ‘중도실용’의 노선이 상처투성이의 마음과 몸을 이어붙여 겨우 지탱하면서도 진정한 몸부림으로 앞으로 나아간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면 국민의 선택이 심판이 되지는 않을 것이라고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