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9월 26일 토요일

[생각] 야간옥외집회, 헌법불합치의 의미

미국산 쇠고기 수입을 반대하는 촛불집회와 관련하여 법원이 위헌법률심판을 제청한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 제10조와 이에 위반한 경우 처벌할 것을 규정한 동법 제23조 제1호에 대하여 헌법재판소가 헌법불합치결정을 내렸다.

헌법재판소의 9인의 재판관 중 5인은 단순위헌의 의견을, 2인은 헌법불합치의 의견을, 그리고 나머지 2인은 합헌의견을 제시하고 있다. 6인의 위헌결정을 선고하기 위한 정족수에는 미달하여 헌법불합치결정을 선고하게 된 것이다.

5인의 위헌의견에 따르면 이 결정은 이미 1994.04.28,91헌바14결정에서 합헌으로 선고한 ‘신고제’와는 달리 헌법 제21조 제2항의 ‘허가’는 행정권이 주체가 되어 집회 이전에 집회의 내용․시간․장소 등을 사전심사하여 특정한 경우에만 허용함으로써 집회를 할 수 있게 하는 제도, 즉 허가받지 아니한 집회를 금지하는 제도를 의미하는 것이므로 집회의 자유의 본질을 침해하는 것으로서 원칙적으로 금지되는 사실상의 사전허가제에 해당한다는 것이다.

즉 집시법 제10조는 야간옥외집회에 관한 일반적 금지를 규정한 본문과 관할 경찰서장의 사전적 심사에 의한 예외적 허용을 규정한 단서를 포함하여 그 전체로서 야간옥외집회에 대한 ‘허가’를 규정한 것이므로 헌법 제21조 제2항에 정면으로 위반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2인의 헌법불합치의견의 요지도 이 법 규정이 지나치게 광범위하게 야간옥외집회의 자유를 제한하는 것으로서 합리적인 범위내로의 입법을 촉구하는 내용의 결정을 한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형사처벌규정에 대한 계속적용의 불합치결정으로 인하여 처벌의 형평성으로 초래될 법적 혼란이 우려되는 점이다.

즉 적용중지의 헌법불합치결정이 아니라 계속적용의 헌법불합치결정은 사실상의 위헌결정이지만 입법형성권의 존중, 법적 안정성 등을 고려하여 새로운 법이 마련될 때까지는 당해 법률이 잠정적으로 효력을 유지하게 하는 것이므로 현재 재판이 진행 중인 형사사건에 어떤 영향을 미치게 될 것인가의 문제이다.

헌법불합치 선언된 법률이 형벌에 관한 법률이면, 종전의 법률 중 위헌으로 구분된 부분은 소급하여 효력을 상실하게 되며(헌법재판소법 제47조 제2항 단서), 그 위헌부분에 의하여 처벌받은 사람은 재심을 청구할 수 있다(헌법재판소법 제47조 제3항)고 규정하고는 있으나, 재판관 조대현의 적용중지의견에서 밝히고 있는 것처럼 이는 위헌법률에 기한 형사처벌을 허용하는 것이고 위헌법률심판제도의 사명을 저버리는 것이어서 우리 헌법상 허용될 수 없는 것이다.

적용중지의견은 헌법재판소가 어느 법률조항에 대하여 헌법불합치 결정을 하면서 그 법률조항을 계속 적용하도록 결정하려면 그 점에 대한 특별한 평의와 합의절차를 거쳐야 한다고도 밝히고 있으나, 이미 5인의 위헌결정의 속에는 적용중지의견이 포함된 것이므로 별도의 합의 없이도 적용중지를 선언할 수 있다고 할 것이다.

재판관 조대현의 적용중지의견에서도 명백히 하고 있는 것처럼 변형결정의 형식으로서 헌법불합치의견을 표시한 재판관 2인이 헌법에 합치되지 아니하는 이 사건 법률조항들의 계속적용을 결정할 수는 없는 점은 분명해 보인다.

헌법불합치결정이 사실상의 위헌결정이라는 점, 그리고 형사적 처벌은 재산적 권리침해의 경우와는 달리 국민의 신체의 자유에 대한 직접적인 위해를 초래한다는 점에 비추어 볼 때 그 성질상 법적용은 중단되어야 하며, 현재 진행 중인 재판에서도 양형판단에서만 고려할 것이 아니라 당연히 무죄선고 또는 재판의 연기를 하여야 할 것으로 생각한다.

이미 헌법불합치결정으로 사실상 위헌으로 선언된 법률을 적용하여 경찰이 집회의 현장에서 법을 적용하여 이를 집행하거나, 그것을 근거로 형사재판을 진행한다는 것은 헌법정신에도 어울리지 않을 뿐만 아니라 무엇보다 국민의 법감정에도 반하는 일이다.

5인의 위헌의견 속에 내포된 적용중지의 의미를 살리는 것이 헌법정신과 국민의 법감정에 더욱 부합하는 일일 것이며, 9인 중 5인의 의견이 이미 위헌으로서 적용중지를 의미하는 것이므로 나머지 4인의 의견이 이미 사실상 위헌으로 선언된 법률의 효력을 결정하는 것은 비합리적인 결론 일 것이라고 본다.

2009년 9월 23일 수요일

[생각] 사실과 인식, 그리고 선택

최근의 기사를 보면 북극의 얼음이 녹아 독일 화물선 두 척이 지난 7월 23일 울산에서 발전소 건설자재를 싣고 오호츠크해협을 통과해 러시아 연안 북극해를 지나 블라디보스톡에 들렀다가, 마침내 북극해를 관통하여 러시아 아르한겔스크항에 도착함으로써 새로운 항로가 개척되었다고 한다.

북동항로(North-east Passage)라고 불리는 이 바닷길을 러시아배가 아닌 국제 상선이 통과하는 것은 처음이고, 북동항로가 열림으로써 기존 항로보다 무려 1만4000㎞로 단축되어 이로부터 유발되는 경제적 효과 때문인지, 우리나라를 비롯한 주변국가들의 비상한 관심을 모으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여기서 생각해보고자 하는 것은 바로 북극의 얼음이 녹는 것이 오늘날 화두가 되고 있는 지구 온난화의 필연적 귀결인지 아니면 주기적 현상의 연속선상에 있는 자연현상에 불과한 것인지의 문제다.

지구온난화는 말 그대로 지구 표면의 평균온도가 상승하는 현상을 말하며, 그 최근의 원인에 대해서는 산업 발달에 따른 화석연료의 사용과 환경의 파괴로 정화기능이 약화되면서 생긴 온실가스의 영향때문으로 대체적으로 파악하고 있는 듯 하다.

그런데 인류의 역사를 되돌아 보면, 온난화는 비단 오늘날의 문제만이 아니라 과거에도 있어왔다고 한다. 차이점이라고 한다면 과거의 온난화의 원인은 주로 자연활동으로 인한 장기적 변화였다면, 오늘의 원인은 주로 인류의 활동으로 인한 단기적인 급격한 변화에 있을 것이다.

과학에 대해서 문외한인 내가 주목하는 것은 동일한 사실(현상)에 대한 인식의 차이들이다. 즉 북극의 얼음이 녹고 있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는데, 그것이 오늘날의 환경적 조건에 의해 결정되어지는 특수한 현상인 것인지, 아니면 이것도 일상적인 자연활동의 한 측면인 주기적인 일반적 현상에 불과한 것인가에 대한 입장의 차이들을 보게 된다.

하나의 사실에 대한 인식의 태도가 중요한 이유는 무엇보다 인류의 지속가능한 생존과 행복의 추구라는 삶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방법의 선택에 있어서도 서로 다른 대책을 추구하게 되는 데에 있을 것이다.

오늘날의 특수한 현상으로서 위기를 지나치게 강조하게 되면 불순한(?) 다른 목적이 개입됨으로써 의도하지 않은 방향으로의 자유의 구속을 초래할 위험성이 있으며, 자연의 보편적 현상으로만 보게 되면 예측할 수 없는 미래에 대하여 대비할 수 있는 시기를 놓침으로써 피할 수 없는 재앙을 초래할 위험도 외면할 수는 없는 것이다.

동일한 현상에 대한 인식의 접근을 다르게 하는 것은 바다로 가는 강물의 뿌리가 여럿이듯이 다른 각도에서 균형을 찾아감으로써 현재로서는 증명하기 어려운 해답을 모색하는 데에는 유용한 접근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절대적 진리라는 것은 사실상 존재하기 어려우므로 오류를 피하고, 실패를 줄이기 위해서도 다양한 접근방식의 선택은 여전히 유용한 분석도구일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단기적인 관점과 장기적인 관점에서의 접근도 현실적인 결과에 있어서는 확연히 서로 다른 결론을 도출하게 되는 경우가 많은 것으로 보인다. 즉 단기적으로는 위험한 현상도 장기적인 관점에서는 추세의 연속선상에 있는 자연스런 현상임을 일상생활의 주변에서도 많이 확인 할 수가 있다.

단편적인 예로 주식시장에서의 주가의 변동을 나타내는 그래프를 살펴보더라도 단기적인 변동을 나타내는 그래프와 장기적인 추세를 나타내는 그래프는 많은 차이를 보인다. 크게 보면 추세 속에 있는 자연스러운 변동도 그 속에 개입되어 있는 순간만큼은 마치 지구의 종말처럼 절박한 것이 사실이다. 현재의 금융위기도 장기적인 관점에서는 또 어느 정도의 추세를 나타낼지는 좀 더 두고 보아야 하겠지만, 단기적으로는 분명한 위험이다.

독일의 사회학자 울리히 벡(Ulich Beck)은 거대기술시스템이 가지고 있는 근본적인 불완전성에 주목하여 현대사회를 ‘위험사회’로 명명하면서, 이 위험 사회를 너머 '새로운 근대'로 진화하기 위해서는 '성찰적 근대화(reflexive Modernization)'가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그는 지금까지의 근대화는 '위험을 감수하는 선택'에 의존해왔지만, 앞으로의 선택은 '속도'보다는 '안전'을, '외형'보다는 '내실'을, '결과' 보다는 '과정'을 중시해야 할 것으로 말한다.

그러나 돌이켜보면 동 시대를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어느 한 순간도 ‘위험’이 아닌 적은 없었다. 비록 예견된 위험이었지만 감수하고 나아갈 수 밖에 없는 선택들이 일상이었다. 시간이 어느 정도 지나고 난 뒤에는 쉽게 안정적인 역사가 되지만, 눈앞의 순간들은 늘 불안정적인 위험으로 강조되면서 본성적인 불안심리를 지배한다. 그래서 종교가 불안정적인 일상적 현실과 잡히지 않는 미래에 대한 위안으로 우리 곁에 자리매김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과거의 시간을 되돌아 보면 굳이 종교가 아니더라도 자연적으로 회피할 수 있었던 사건들도 종교의 이름으로 부풀려지거나 고통을 배가한 역기능적 안순환의 경험(종교전쟁 등)들도 많이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이에 의존할 수 밖에 없는 경향들의 주류는 바로 여전히 알 수 없는 미래에 대한 불안감때문이리라. 종교보다는 과학적 성찰들이 인간의 미래에 대한 불안감들을 모두 잠재워줄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지금 뉴욕에서는 2012년 온실가스를 감축하기로 합의한 ‘교토의정서’가 만료됨에 따라 오는 12월 새로운 협약을 마련하고자 코펜하겐에서 열릴 기후변화총회에 대비하여 유엔기후변화회의가 열리고 있다. 사상 최대 규모의 회의에서 세계 정상들은 새로운 협약의 필요성에는 동의하지만, 여전히 온실가스 감축량을 둘러싼 선진국과 개도국 간 이견은 크게 좁히지 못하고 있다고 한다.

현재 분명히 진행중인 지구온난화의 사실에 대한 ‘회의론’과 ‘옹호론’, ‘추세론’과 ‘위험론’을 떠나서, 단기적으로는 분명한 현실인 ‘오늘의 위험사회’에서 장기적으로 지속가능한 생존을 하기 위해 인류가 어떤 선택을 해나갈지는 역설적으로 여전히 ‘현재의 위험’ 속에 있다. 그 선택은 ‘자유’보다는 ‘공정’을, ‘선동’보다는 ‘성찰’을, ‘탐욕’보다는 ‘공감’을, ‘독선’보다는 ‘협력’을 중시해야 할 것으로 생각한다.

[생각] 자유와 평등, 그리고 박애

구시대의 모순에 항거하여 목숨을 건 프랑스혁명의 결과로 쟁취한 이래로 시민의 권리로 인정되어 권리장전으로서 오늘날 우리 헌법에도 명시되어 있는 자유와 평등의 진정한 의미는 과연 무엇일까. 논란은 있지만 1875년 공화국 헌법(제3공화국 헌법)이 채택되면서, 추가적인 공식이념으로서 채택된 박애의 정신이란 또한 과연 무엇일까.

자유란 원하지 않는 구속으로부터의 해방을 목표로 하는 개별적 자유의지의 실현 등의 의미로, 평등이란 합리적 이유없는 차별적 대우의 배제 등으로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자유는 일반적인 행동의 자유를 그 주요 내용으로 할 것이지만, 현대 사회에서는 타인의 권리의 침해금지, 도덕규범의 준수 등을 그 내용으로 하면서 스스로의 내재적 한계를 갖는 개념이다.

평등이란 자유를 바탕으로 한 인간 본성의 질서가 예견하지 못한 또 다른 힘에 의하여 어느 한 쪽으로의 쏠림을 방지하여 균형을 유지하게 함으로써 보다 많은 다수 인간들의 삶을 풍요롭게 하기 위한 도구적 권리이다. 물론 평등권도 자유권과 마찬가지로 천부인권으로서 자연적인 기본적 인권이지만, 자유의 침해를 한계짓는 방어막으로서의 역할도 함께한다고 본다.

따라서 어찌보면 자유가 갖는 내재적인 한계는 평등의 실현으로 결정되는 부분이 존재하게 된다. 즉 개인의 무한의 자유를 인정할 수 없는 이유는 타인의 권리나 도덕규범 등을 침해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만 허용되는 것이라면, 이때 타인의 권리와 규범의 내용을 고려하는 기준으로서 중요한 것 중의 하나가 바로 평등의 이념일 것이다.

개인적인 견해로 아직도 유효한 인간의식의 활동으로서의 이데올로기의 내용도 ‘자유’를 우선할 것인가, ‘평등’을 우선할 것인가의 문제로 귀결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 방법은 모두 동일하게 민주주의를 채택하면서도 자유를 강조하면 ‘자유민주주의’체제로, ‘평등’을 강조하면 ‘사회민주주의’체제를 말하게 되는 것이리라.

견해의 차이는 있겠지만 우리 헌법의 정신은 바로 ‘자유’를 우선하는 ‘자유민주주의’체제를 기본으로 하지만, 이로 인한 사회적 불평등과 갈등을 해소하기 위해 여러 가지 ‘평등’을 고려한 제도적 장치들을 하고 있다. 대표적인 것이 국가의 규제와 조정을 허용하고 있는 ‘사회적 시장경제질서’일 것이며, 그 외에 이른바 ‘사회적 기본권’의 이름으로 보장되는 ‘사회적 자유권’들이다.

이런 이해들을 바탕으로 보면 우리의 정치질서를 ‘사회적 자유주의’로 규정하는 견해가 타당한 듯하지만, 그 구체적인 내용과 일의 선후, 방법의 선택 등을 두고는 여전히 많은 견해의 차이가 있는 듯하다. 그러므로 결국은 ‘제도의 문제’가 아니라 ‘해석의 문제’이며, ‘가치의 문제’인 동시에 ‘사람의 문제’인 것이다.

극단적인 예를 든다면 작금의 현실을 토대로 지금 20대80의 사회를 평등하다고 볼 것인가, 50대50의 사회를 평등하다고 볼 것인가. 80대20의 사회를 평등하다고 볼 것인가의 가치와 선택의 문제인 것이다. ‘보수적 세력’들은 지금 현재의 20대80의 구도를 유지하려 하고, ‘진보적 세력’들은 지금의 구도를 깨고 뭔가 변화를 추구하는 사람들일 것이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고, 정치적 동물이므로 모든 활동은 상대적인 관계 속에서 형성된다. 그리고 생물학적 존재로서의 인간의 본성은 ‘생존의 추구’이므로 바로 ‘생명현상으로서의 욕망’이다. 양육의 결과로서 ‘다듬어진 욕망’이 또 다른 인간 본성인가의 문제는 두고 보더라도 ‘생존의 본성’은 ‘양육의 본성’을 지배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민주주의’조차도 늘 감시하지 않으면 후퇴하고 마는 것이다.

변화를 추구하는 진보의 가치는 유기적 생물체의 진화에서와 마찬가지로 끊임없이 분화하므로 진보의 분열은 본질적인 생명현상이다. 그러므로 진보적 세력들이 분열하는 것을 나무라는 것은 내가 보기에는 진보더러 진보적 가치를 포기하라는 말과 같다. 따라서 진보의 연대는 일시적으로 사안별로는 가능할지 몰라도, 영속적인 연대는 본질적인 속성과 배치되므로 힘든 일이다.

자유와 평등 그리고 박애의 프랑스혁명의 사상 중에서도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박애사상이다. 1789년 8월 26일에 발표한 인권선언에도 박애는 거론되지 않았고, 혁명과 관련하여 유일하게 ‘박애’를 강조한 기록은 1793년 파리시 집정관회의이며, 1875년 공화국 헌법(제3공화국 헌법)이 채택되면서 공화국의 공식 이념으로서 등장하였다고 하지만, 박애로써 자유와 평등은 비로소 규정된다.

자유의 가치도, 평등의 가치도 박애를 바탕으로 하지 않는다면 인간본성인 ‘생명현상으로서의 욕망’과 비록 양육의 결과이긴 하지만 ‘다듬어진 욕망’의 갈등구조가 탐욕의 유혹을 뿌리치지 않고 선순환을 하리라는 보장을 할 수 없다. 끊임없이 ‘박애’를 양육해야 하는 이유이다. 일본의 새로운 총리 하토야마의 ‘우애’도 바로 이것을 말하는 것이라고 보며, 늘 가슴에 품고는 있지만 익숙하게 내뱉지 못하는 말 ‘사랑’이 또한 그것이리라.

2009년 9월 20일 일요일

[생각] 국민과 국가

제도화된 권력으로서 국가가 발생한 이후로 국가와 그 구성원으로서의 국민의 관계는 끊임없이 진화하고 있다. 국가의 지위는 크게 침탈자로서의 국가, 조정자로서의 국가, 보호자로서의 국가, 동행으로서의 국가로 나누어 볼 수 있고, 경찰국가, 야경국가, 복지국가, 문화국가의 단계를 거치면서 그 역할의 중요성도 각 의미를 달리 한다.

즉 경찰국가의 시대에는 침탈자로서의 국가의 기능이, 야경국가에서는 조정자로서의 국가의 기능이, 복지국가에서는 보호자로서의 국가의 기능이 강조되어 왔던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더라도 제도화된 권력인 국가의 본질적 속성인 침탈자, 조정자, 보호자의 성질은 오늘날도 여전히 유효하며, 현대국가의 성질을 문화국가로 보는 개인적 입장에서 국가는 공동체 형성의 동등한 요소로서 국민과 좋은 동행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원래의 의미의 문화국가는 국가가 국민의 자유를 보장하는데 그치지 않고, 이를 적극적으로 보호하는 의미의 복지국가 또는 사회법치국가와 동일한 의미라고들 하고 있으나, 개인적인 견해로서는 여기서 한걸음 더 나아가 현대 사회의 다양한 이해관계를 적극적으로 조정하여 국민의 참여를 유도하고, 이를 폭넓게 허용하면서 공감대적 공동체 형성을 위한 동등한 동반자로서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을 도모하는 능동적 동행으로서의 ‘공정국가’를 의미한다.

영국의 법학자 헨리 제임스 섬너 메인 경(Sir Henry James Sumner Maine, 1822∼1888)이 언급한 ‘신분에서 계약으로’의 ‘법진화의 법칙’도 현재까지 여전히 유효하지만, 이제는 여기서 더 나아가 계약의 형식보다는 내용을 보다 더 중요시하면서 ‘계약의 자유’에서 ‘계약의 공정’으로의 가치의 ‘거대한 변환’이 이루어져야 할 시점이다. 즉 자유만이 능사가 아니며 공정한 가치에로의 고민이 요구되는 것이다.

칼 폴라니는 그의 저서 ‘거대한 변환’에서 자본주의 체제의 불안정요인은 상품화할 수 없는 것들 또는 상품화해서는 안 되는 것들을 상품화했기 때문이라고 했다. 즉 인간이 인간일 수 있게 하는 가치인 노동능력, 제도와 신뢰의 표시인 화폐, 만인이 공유해야 할 자연 등을 상품화함으로써 자본주의는 필연적으로 불안을 발생시킬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지금은 인간의 본질적인 자유마저도 상품으로서 포장되고 있는 것은 아닌지 경계할 일이다.

자본주의 체제의 불안정성이 그 가치의 본질적 성질의 것이라면, 그리고 그 불안정적 요인들을 욕망을 바탕으로 하는 현대 사회의 구조에서 완전히 제거해버릴 수는 없는 것들이라면 불안정 요인들의 안정적이고 선순환적인 작용을 위한 기제들의 장치가 필요할 것이다. 그 제도를 운영하는 가장 강력한 권력이 국가이므로 ‘자유를 향한 절차에서의 국가의 공정’이 더욱 요구되는 이유이다.

지금 우리뿐만 아니라 세상은 비록 시장을 강조하고는 있지만, 합리성을 전제로 하는 본래적 의미의 시장은 흔적을 찾기 어렵고, 욕망의 한계를 넘어 경쟁의 이름으로 탐욕의 질주를 하고 있는 ‘난장(亂場)’만이 보일 뿐이다. 더욱이 오늘날 위험사회의 문화국가에서 공정한 심판자로서의 국가기능과 역할의 강조가 더욱 필요한 이유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근 우리 국가기관이 국민을 상대로 명예훼손을 이유로 손해배상소송을 제기하는 것과 같이 국민을 향한 국가의 적대적 행태는 역사를 거꾸로 돌려 과연 국가가 국민에게 무엇으로 존재하는가에 대한 의문을 다시금 갖게 한다. 정부가 법원을 동원하여 국민을 상대로 무엇을 얻고자 함이며, 그것이 이른바 ‘명예’라면 누구의 무엇을 위한 명예인지 묻지 않을 수 없다.

국민에게 책임을 묻기보다는 차라리 노무현처럼 다시 정부의 신임을 묻는 것이 오히려 더 떳떳하지 않겠는가. 현행 헌법상으로는 신임투표가 불가능하다는 견해도 있으나, 이미 선례로서 헌법적 관습이 되어 있으며, 규범도 유기적 진화의 형식으로 이해하는 개인적 입장으로는 현행 헌법해석으로도 가능한 일로 생각한다. 성찰없이 일방적으로만 관행화된 권력행사는 권력을 휘두르는 자와 영향을 받는 자들 모두를 잔인하게 만들며 결국에는 많은 다수를 불행하게 함으로써 공동체의 상처로 남게 된다.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는 레위기 19장 18절 말씀과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받고자 하는 대로 대접하라’는 마태복음서 7장 12절 말씀은 하나의 하느님을 두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는 그가 국가의 원수이든, 국민이든 동일한 행동원리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더군다나 공동체의 행복을 지향하는 문화국가로서의 성찰하는 ‘공정국가’라면 국민을 상대로 침탈자로서 싸움을 벌이기보다는 조정자, 보호자로서 더 큰 사랑을 실천함으로써 더 많은 사람들이 행복할 수 있는 동행으로서의 본분에 충실해야 할 것이다.

2009년 9월 13일 일요일

[생각] 사상의 자유의 진화


최근의 개헌 논의에 있어 기본권적 측면에서도 사상의 자유를 양심의 자유와 구별하여 별도로 규정하려는 입장들이 있다. 학자들의 입장도 양자를 구별하여 이를 지지하는 입장과 양심의 자유로 충분하다는 입장, 그리고 양심의 자유와 구별되지만 현행 헌법상의 다른 규정을 근거로 사상의 자유를 도출할 수 있다는 견해 등으로 나뉘고 있다.

개인적인 견해로는 현행 헌법의 규정으로도 충분히 사상의 자유를 규정할 수 있으며, 구체적인 근거로 일차적으로는 헌법 제19조의 양심의 자유를 들 수 있고, 부차적으로는 헌법 제10조와 제37조 제1항 등을 그 근거로 들 수 있을 것이다.

‘사상’의 개념을 ‘개인의 외부 세계에 대한 인식의 형성과 그 실현’으로 이해한다면, 헌법재판소의 ‘양심’에 대한 넓은 정의인 세계관, 인생관, 주의, 신조 등에 포섭될 수 있는 것으로 이해되며, 일반적으로는 사람이 인간·자연·사회에 대해 품는 현실적이며 이념적인 의식의 형태를 총괄하는 ‘이데올로기(ideology, 주의, 主義)’를 포함하는 것이리라 여겨진다.

이데올로기라는 용어는 데스튀트 드 트라시(Destutt de Tracy)의 ‘이데올로기원론’(1804년-1815년)에 처음으로 등장한 이후,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공저 ‘독일이데올로기’(1845년)에서는 관념 그 자체가 아니라 생산양식 등의 사회의 하부구조와의 관계성에 있어서 파악되는 상부구조로서의 관념을 의미하는 ‘허위의식’으로서의 이데올로기까지 다양한 정의들이 있다.

또한, 냉전의 종결 후 오늘에 이르러서는 사회민주주의적인 중도, 복지정당이 세계의 대세를 점하여 이전의 이데올로기를 내세움 없이 직업적, 전문적인 정치가・관료에 의하여 순수한 생활향상을 목표로 하는 것이 현대의 대세라며, 성급하게 나아가 이데올로기의 종언을 고하고 있는 실정이다.

그러나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고, 정치적 동물이며, 여전히 의식으로써의 조종이 가능한 존재이므로 쉽사리 이데올로기의 종언을 말하는 것은 섣부른 판단이 아닐까하는 생각이다. 물론 이전의 계급투쟁을 향한 기계론적 관점과는 달리 현대 사회에서는 다양한 가치들의 상대적인 관점의 기능론적인 측면을 더 강조하는 차이는 있지만, 이데올로기는 인간사회에서 여전히 유효한 ‘의식활동’임에 분명하다.

요즘 흔히 말하는 보수와 진보의 대립도 이러한 이데올로기의 한 측면으로 이해할 수 있고, 보수적 가치와 진보적 가치가 각자의 생활향상을 목표로 하더라도 그 구체적인 내용에 있어서는 스스로도 다양한 차이를 내포하고 있는 개별적 가치들의 갈등과 욕망의 구조로 뚜렷이 남아있는 현실은 누구도 부인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개별가치들도 크게 다시 세가지의 부류집단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즉, ‘교활한 집단’과 ‘성찰하는 집단’ 그리고 ‘무지한 집단’이 그것이다. 이에 대응하여 보수적 집단은 ‘교활한 보수’, ‘합리적인 보수’, ‘무지한 보수(날보수)’로, 진보적 집단은 ‘교활한 진보’, ‘책임있는 진보’, ‘무지한 진보(날진보)’ 등으로 구분 가능하다고 본다.

이른바 ‘성찰하는 집단’으로서 ‘합리적 보수’와 ‘책임있는 진보’는 끊임없이 조화로운 공생의 방법을 찾기 위해 고민하는 가치의 본질에 충실한 바람직한 집단의 사람들이며, ‘교활한 진보’와 ‘교활한 보수’는 비록 깨어있지만 변절을 일삼아 신뢰할 수 없는 이기적인 집단들이고, ‘무지한 보수(날보수)’와 ‘무지한 진보(날진보)’는 소질과 환경의 영향으로 맹목적인 가치에 종속된 성향을 보이는 계몽이 필요한 대상들이다.

‘성찰하는 집단’으로서 ‘합리적 보수’와 ‘책임있는 진보’의 대화가 수월한 이유는 그들 집단의 공통점인 ‘제도화된 세력’이라는 점에도 이유가 있다. ‘교활한 진보’와 ‘교활한 보수’들도 같이 제도화된 세력들이지만 진정성이 부족하며, ‘무지한 보수(날보수)’와 ‘무지한 진보(날진보)’는 ‘개인과 제도로부터 소외된 세력’으로서 쉽사리 극단적인 선택과 행동에 이용당하기 쉬운 경향들이 있다.

오늘날의 사회도 예전의 역사와 마찬가지로 이러한 세력들 간의 끊임없는 갈등과 투쟁, 그리고 연대의 연속선상에 있다. 다만 싸움의 형식적인 모습만 차이가 있을 뿐, ‘먹고 살기위한 전쟁’은 계속되고 있는 것이다. 각자의 사상은 여전히 유효한 생존의 가치들이며, 연대를 향한 갈증은 변함없는 인간 삶의 현주소다. 그러므로 이데올로기는 끝난 것이 아니라 시간을 따라 진화하고 있을 뿐이다. 개헌논의와 상관없이 사상의 자유가 무엇보다 중요한 이유이기도 하다.

2009년 9월 12일 토요일

[생각] 인식과 의사, 선의와 악의


6일 새벽 예고없는 갑작스런 북한의 댐 방류로 경기도 연천군 임진강 수위가 높아져 야영객 등 6명이 모두 숨진 채 발견되는 사고가 있었다. 북한은 7일 판문점 남북 적십자 채널을 통해 황강댐 방류에 대한 해명을 요구하는 우리측 전화통지문에 대해 이례적으로 발빠르게 답변을 보내왔지만, 인명피해와 관련해 사과나 유감 표명은 없었다.

비록 북한은 통지문에서 "댐 수위가 높아져 물을 방류했다"면서 "앞으로 많은 물을 방류할 때는 사전 통보하겠다"고 밝혔으나, 당시 북한쪽 강원도와 황해남도 지역에 수해가 우려될 기상조건이 아니었다는 점, 또 새벽시간에 많은 물을 한꺼번에 쏟아낸 점에 대한 해명이 충분치 않다는게 대체적인 시각이다.

통일부 장관은 9일 북한의 예고 없는 대량 방류로 우리 국민 6명이 사망·실종한 ‘임진강 참사’에 대해 국회 외교통상통일위원회 회의에서 의원의 질의에 ‘북측이 의도를 갖고 했다고 보고 있다’고 말했으며, ‘북한이 이번에 무단 방류를 했다고 스스로 밝혔고, 이는 사고나 실수에 의한 방류가 아니라 북한의 의도적 방류를 확인한 것’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정부는 나아가 국제법 위반 여부를 검토하고 있으며, 전문가의 견해는 명백히 국제 관습법상 모든 국가는 국제하천을 이용함에 있어 다른 국가에 피해를 주지 않도록 적절한 조치를 취할 의무가 있으므로 이의 위반에 대한 책임을 물어야 한다는 입장이다. 그러나 선언적 의미 이상의 실효적인 대책은 사실상 없는 실정이다.

그런데 지난 10일 북측이 ‘임진강 사건’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없이 우리 정부에 개성공단 북측 근로자의 임금 인상 문제와 관련, 예년 수준인 5% 인상안을 제시한 것으로 확인되어 사실상 지난 6월 남북 간 2차 실무회담에서 제시한 개성공단 북측 근로자 임금 300달러 인상안을 별다른 논의 없이 스스로 철회한 것으로 보여 북한 내부의 미묘한 갈등상황도 엿보이고 있는 현실이다.

‘임진강 참사’ 희생자에 대한 보상협상은 한차례 결렬되는 등 난항 끝에 11일 유족과 수자원공사, 연천군이 희생자 1명당 5억원의 보상금을 지급하기로 합의했으며, 경보관리시스템 오작동으로 피해를 막지 못한 것으로 드러난 수자원공사 임직원 5명에 대해서는 직위해제 조치가 내려졌다.

분명 이번 사건에서 북한은 ‘물을 방류’한다는 사실에 대한 인식은 분명히 있었다고 봐야 한다. 그러나 그 방류로 인하여 우리 측의 인명피해에 대해서는 충분히 예견할 수 있었느냐에 대해서는 별도로 따져볼 수 있겠으나, 방류의 규모로 볼 때 ‘미필적 고의’, 즉 인명피해가 있을 수도 있지만 별로 개의치 않은 흔적들을 충분히 발견할 수 있다.

이번 사건을 벌써 많은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희미해지고 있는 ‘용산 참사’와 비교해 보면 많은 유사점이 있다. 상황을 놓고 볼 때 인명피해의 가능성을 예측할 수 있지 않았느냐의 문제와 회피가능한 다른 방법이 있었음에도 최선의 주의의무를 다하지 않은 책임으로부터 과연 모두가 자유로운가의 문제에 있어서는 여전히 의문이 많다.

현재 진행 중인 재판에서 검찰은 참사 관련 수사기록 중 경찰관들의 직무집행에 위법이 있었는지에 대한 수사기록 3000여쪽을 열람·복사할 수 있게 해주라는 법원의 결정에도 불구하고 이를 공개하지 않고 있다고 한다. 검찰의 비공개입장은 확고한 듯 하며, 용산 참사의 희생자들은 보상은 커녕 한마디의 사과도 얻지 못하고 주검을 안고 여전히 거리에 있다.

두 사건을 놓고 볼 때 ‘임진강 사건’에 대한 북한의 책임은 분명해 보이며, ‘용산 사건’에서도 이유야 어떻든 억울한 생명들의 희생이 있었고, 정치적인 견해와 상관없이 ‘생명의 기준’으로 볼 때도 의심의 여지없이 보편 타당한 기준으로 차별없이 존중받아야 할 존귀한 생명들이며, 동등한 권리를 가진 국민들이었다.

세상에 선의와 악의가 있다면, 종교적 기준 이전에 제도적으로 이미 마련된 법의 기준에 더욱 충실할 필요가 있다. 즉 악의는 ‘알고 행하는 것’이며, 선의는 ‘모르고 저지르는 일’이다. 행여 누군가 타인에게 허용할 수 없는 피해를 준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의도적으로 어떤 일을 도모한다면 그는 분명히 ‘세상의 악의’다.

법의 정신은 그런 보편 타당한 정의의 기준에 최대한으로 충실해야 한다. 법의 저울은 여전히 건재한데, 법을 해석하고 적용하는 잣대들이 균형감각을 잃어 버리면 권위는 땅에 떨어지고 신뢰는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 법의 문제가 아니라 사람들의 문제인 이유다. 진보하는 역사는 소급하여서도 그 책임을 묻는 것이 헌법정신이라는 사실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2009년 9월 11일 금요일

[생각] 탐욕의 제국에 숨겨진 얼굴


로마 제국의 역사를 가진 나라, 이탈리아의 총리가 연일 구설수에 오르내리고 있다. 실비오 베를루스코니(Silvio Berlusconi)는 2000년 포브스지가 집계한 개인자산 순위에서 120억 달러의 재산을 보유하여, 이탈리아 1위, 세계 14위의 부자로 기록된 인물로서 이탈리아 최대의 미디어그룹의 소유주이자 유명 축구구단인 AC밀란의 구단주이기도 하며 1994년~1995년, 2001년~2006년 이탈리아 총리를 지낸 데 이어, 2008년 5월부터 다시 총리로 재직 중인 인물이다.

실비오 베를루스코니 이탈리아 총리의 부인 베로니카 라리오(53)여사는 베를루스코니 총리가 속옷모델 노에미 레티치아의 18세 생일파티에 참석한 사실을 알게 된 후 4월 말 이혼을 결심하게 되었으며 섹스 스캔들로 남편이 ‘세상 사람들 앞에 우스운 인물’이 되고 있어 참다못해 이혼을 요구한 것으로 보도되고 있다.

실비오 베를루스코니 이탈리아 총리는 지난해 자신의 로마저택에서 성매매 여성들과 밤샘파티를 즐겼다는 의혹이 불거지는 등 끊임없는 추문에 휩싸였고, 2007년에는 현재 기회균등부 장관이 된 방송연예인 출신 마라 카르파냐에게 ‘내가 결혼을 하지 않았다면 지금 당신과 결혼할 것’이라고 말했다가, 부인 라리오의 강력한 요구로 언론을 통해 공개 사과하는 망신을 당한 바 있으며, 최근에는 쇼걸들을 유럽의회 선거에 출마시키려는 시도로 여전히 시끄럽다.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할 정도의 역사적 자부심을 배경으로 하고 있고, 지금도 로마의 한 가운데 로마의 주교, 즉 교황이 통치하는 신권 국가로서 가톨릭교회의 상징이자 중심지인 바티칸시국을 둘러싸고 있는 하늘 아래에서 일어나고 있는 그대로의 현실이다.

법학을 전공한 베를루스코니는 기업가로서 성공을 하였으나 막대한 자금조성경위는 여전히 베일에 싸여 있으며, 수많은 법적 공방에서도 상황을 유리하게 조성하여 일국의 총리에 까지 오르게 되었다. 나아가 그가 장악하고 있는 미디어매체들과 스포츠구단과 여러 관심사업들을 엮어서 국민들의 마음을 통째로 장악하고 있다며 큰 소리를 치고 있고, 여전히 많은 국민들이 자신을 지지한다고 호언하고 있다.

문제는 비록 이탈리아의 새로운 뉴스보도방침이 이른바 정치적 공방이 큰 사안에 대해 ‘정부-야당-여당’ 순으로 입장을 듣는 ‘샌드위치뉴스’ 방식으로 시청자들의 심리를 교묘히 이용하고 있다고는 하지만, 다수의 국민들이 그의 말대로 그의 삶의 방식을 경외하고 있는 듯한 분위기도 상당한 부분 자리잡고 있는 것도 사실인 듯 보이는 점이 있다. 예를 들면 대부분의 국민들이 그처럼 부자가 되고 싶어 한다는 인터뷰 등이다.

정치학자들조차 사람들이 베를루스코니의 남성우월주의 기질에 익숙해져 있고, 금새 이번 일들을 잊을 것이며, 베를루스코니는 변함없이 좌파에 대한 신랄한 공격을 개시할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실비오 베를루스코니 이탈리아 총리는 자신의 인기가 여전히 높고, 자신은 ‘아름다운 여성들’을 포함한 모든 이를 사랑한다며 비판적인 여론을 비웃으면서 ‘이탈리아 국민은 내 안에서 스스로를 발견하는 것으로 보인다’라고 까지 말할 정도로 자만에 젖어 있는 지경이다.

국민들의 여론까지 자신의 모습에서 나온다는 오만에 찬 탐욕의 제국의 현실을 보면서 그 속에 가려진 제국의 국민들의 얼굴들도 과연 실비오 베를루스코니 이탈리아 총리의 얼굴을 닮아 있을 것인가에 강한 의문이 있지만, 그가 여전히 그의 방식대로 득세하여 간다면 그의 얼굴이 바로 이탈리아 국민들의 얼굴이 될 것이다. 지금 대한민국의 얼굴이 대한민국 다수 국민들의 숨겨진 얼굴이었듯이 말이다.

2009년 9월 9일 수요일

[생각] 존재와 인식과 규범



사회현상의 하나인 범죄의 원인을 두고 학자들은 일반적으로 소질과 환경을 그 원인으로 설명하고 있다. 소질이란 본성이 좌우하는 부분이어서 자유의지보다는 유전학적 범죄행위결정인자를 중요시하고, 환경은 양육의 결과로서 범죄인이 처한 사회적 환경을 범죄의 주요 원인으로 보고 분석하는 입장이다.

형사정책적인 입장에서 범죄의 대책과 관련하여서도 유전학적 본성인 소질의 측면을 강조하는 입장에서는 범죄가계연구를 중시하고, 생물학적 측면에서의 범죄대책, 예를 들면 거세나 단종 등의 방법도 불사하면서 범죄자를 치료의 대상으로 파악하는데 반해서, 양육의 조건인 사회적 환경을 범죄의 원인으로 중요시하는 입장에서는 범죄의 대책도 범죄인의 개선과 교화에 초점을 맞춘다.

역사적으로 범죄행위에 대한 책임인 형벌의 부과에 대해서도 예전에는 주로 응보형주의에 치우쳐 있었다면, 오늘날은 책임에 따른 형벌, 특히나 개선이나 교화형에 중점을 두고 있는 것이 행형의 현실인 듯하다. 그 책임의 근거와 관련해서도 존재와 인식에 따른 책임이냐, 아니면 규범에 따른 책임이냐의 논란이 있다.

극단적인 일탈행위인 범죄를 제외한 일반의 사회현상에 있어서도 과학에서의 실험의 결과와는 달리 동일한 조건하에서도 인간행동의 반응은 동일하지 않다. 이는 오늘날 70억명의 인류가 하나의 인간의 유전자를 가지고서도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70억가지의 문화를 형성하고 있는 현실로서도 이야기될 수 있겠다.

과학에 대해서는 문외한이지만 과학적이기 위해서는 최소한으로 요구하는 것이 계량화될 수 있고, 증명가능하며, 동일한 조건하에서 동일한 결과를 요구하는 것들이라면, 분명 인류는 과학적인 본성들을 갖고는 있으나, 그 삶의 결과인 문화는 늘 과학적으로 잘 설명되지는 않는다. 그것이 과학에서는 항상 최선을 요구하지만, 현실에서는 차선에 만족해야하는 이유인지도 모르겠다.

개인적으로 과학은 존재를 탐구하여 그 구성요소들을 분석하여 체계화하는 학문이며, 철학과 문학은 현상을 인식하여 설명하는 학문이고, 종교와 규범학은 통제되지 않는 인간 의지의 경계를 제어하는 학문이라고 생각한다. 따라서 인간의 삶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어느 하나의 분야만으로 완벽하게 해결할 수는 없으며, 모두를 관통하는 통합적 사고가 필요한 이유이기도 하다.

자유의 확장영역도 마찬가지여서 70억 인류의 자유는 그들의 존재론적인 공통분모를 추출해내어, 각자의 문화와 환경의 조건들에 대한 인식을 근거로 규범적인 틀을 넓혀가며 만들어가는 공동체작업에 다름아니다. 각 지역이나 국가마다 자유의 실현형태가 차이가 나고, 자유에 책임이 따르는 이유이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그렇더라도 인간이 인간으로서 당연히 존중받아야 할 생명과 평등, 행복의 추구와 같은 본질적 권리를 제한해서는 안 될 것이며, 인간다운 생활을 위한 최소한의 조건들(예를 들면, 기본소득제도 등)을 제도적으로 보장하여 존엄한 인간의 문화를 가능한 많은 사람들이 함께 누릴 수 있었으면 하는 바램을 가진다.

인간이 인간으로서 존엄한 이유가 있다면 생물학적으로 우열한 유전자가 있어서가 아니라, 인간은 스스로를 존엄하게 만들어갈 수도 있는 제도적 존재이기때문은 아닐까. 그렇더라도 믿을 수 없는 제도로써 인간의 존엄성을 침해당하지 않기 위해 안전망으로 그 사이에 신의 영역을 작위적으로 만들어 놓은 것은 아닐까.

아무튼 인간의 존재로부터 결정되는 인간의 삶을 인식하고 자유의지로 인간다운 삶을 영위하려고 하는 다수 인간들의 공동의 작업이 인간문화의 요체일 것이다. 따라서 규범으로서의 종교와 법도 신이 생물학적으로 존재하는가의 여부와는 상관없이 분명히 제도로서 있는 것들이며, 중요한 것은 각자의 선택에 대한 자유와 존중일 것이다.

[생각] 언어와 문화와 생존



새 정부가 출범한 이후의 변화 중 하나가 이른바 글로벌인재의 육성에 기여할 목적으로 영어교육의 중요성을 많이 강조하고 있다. 때맞춰 인터넷기술의 발달로 등장한 SNS미디어의 등장으로 영어의 세계화에 한껏 힘이 실린 모습이다.

신자유주의의 급격한 확산은 결국 무한경쟁을 초래하고 가장 경쟁력있는 존재만이 살아남는 시스템이므로 결국은 많은 사람들이 사는 길이 아니라 극소수의 사람만이 살아남는 체계이다. 그러므로 이른바 경쟁력있는 소수의 선진국들이 자유주의의 이름으로 과감한 대항해를 계속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예고도 없는 경제위기에 봉착하자 예외없이 말로만 자유주의를 내세우면서 자국의 이익을 보호하기 위한 모든 생존의 보호조치들을 취하고 있다. 대외의존도가 높은 우리의 입장에서는 지나친 보호주의보다는 무역에서의 자유주의입장이 유리할 듯하여 현 정부는 자유무역을 지속적으로 강하게 주창해오고 있는 것 같다.

그러한 시대상황이나 여건상의 필요에 의하여 영어교육을 부수적으로 중요시하는 것은 당연한 일일 것이지만, 우리의 문화를 소홀히 하여 자칫 우리의 글과 말이 사라져버리기라도 한다면 지나친 비약일지는 모르지만 결국은 민족의 흡수소멸이라는 비극을 초래하게 될지도 모를 일이다.

민족주의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생존의 문제를 말하고 싶은 것이다. 우리가 아무리 영어를 중요시하고 잘한다고 할지라도 그들의 문화 속에서 습성이 된 사람들과는 경쟁이 되지 않을 것이며, 극히 소수의 과학기술자나 자본가, 그들의 자손만이 살아남을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아프리카의 예를 들어보더라도 많은 선진국들이 빵으로 그들을 다스리고 있지만, 아직도 사라지지않고 있는 이유는 그들의 언어와 문화가 여전히 살아있기 때문이다. 만약 그들이 그들의 문화와 언어까지 이른바 세계화의 이름으로 영어로 통일한다면 모든 면에서 취약한 그들이 지구상에 존재할 수 있겠는가?

일각에서는 선진국의 물량공세에 무너지고 있는 징조도 보이지만 여전히 그들의 언어와 문화를 지키고 있기 때문에 그들도 그들의 자원을 무기로 하여 무시할 수 없는 거래의 상대방이 되고 있는 것이며, 다른 외부세력으로부터도 고려할만한 시장으로서 그들의 생존을 보장받고 있는 일종의 안전한 보호막을 갖춘 것이다.

아무리 가치와 제도를 떠들어도 위기의 상황에는 결국 생존의 문제와 욕망의 경쟁만이 남게된다. 지금도 암암리에 희귀자원들을 무기화하여 그들만의 리그를 도모하고 있는 이때 모든 것이 희소한 우리가 살아남는 길은 영어의 경쟁력은 키우되, 우리 말과 글을 중심으로 한 우리의 문화를 지키고, 독창적인 기술력을 키우는 일이어야 할 것이다.

어찌보면 신자유주의라는 것은 욕망의 탈을 쓴 탐욕의 신제국주의의 다른 이름에 불과한 것일지도 모를 일이다. 개인의 욕망을 인정은 하지만, 지나친 탐욕을 경계하면서 공동체의 질서 속에서 각자의 자유를 지켜내기 위해서라도 우리의 말과 글, 그리고 문화를 더욱 소중히 지켜내야할 것으로 생각한다.

2009년 9월 7일 월요일

[생각] 오바마의 버려진 개를 말하다. 8 - 욕망의 사회


오바마가 백악관에 입성한 지도 벌써 9개월째에 이르고 있다. 연일 언론들이 호들갑을 떨면서 관심을 보였던 ‘퍼스트 도그(First Dog)’의 주인공은 ‘포르투칼 워터 도그’ 종의 강아지로 결정되었으며, 최근의 전해지는 근황을 보니 그 새 많이도 컨 것 같다.

최근 미국 사회의 가장 큰 화두는 뭐니뭐니해도 오바마의 공약 중 하나인 ‘의료개혁’의 문제인 듯 하다. 그러나 공화당을 중심으로 한 미국의 보수진영들은 그들의 언론과 보험, 제약사를 중심으로 한 관련업계를 앞세워 연일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키기에 혈안이 되어 있는 듯 하다.

저명한 경제학자 폴그루그만은 이를 개인들 속에 잠재된 욕망의 분출로서 미국 사회의 광기로 묘사할 정도이니, 여기서 우리는 현재 세계에서 가장 민주적이고 경제적 선진국 중의 하나라는 인간 사회를 통해서 이기적 탐욕을 향한 무한 질주의 위력을 보는 듯 하여 마음이 가볍지만은 않다.

진보적 가치를 내세우며 출발한 오바마는 백악관 참모진들의 구성부터도 기득권층인 보수진영을 배려한 인사정책을 구사했고, 모든 행보에서 우리의 전 대통령 노무현처럼 ‘공생을 위한 조화’에로의 고민의 흔적들을 많이 보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수진영을 중심으로 한 기득권층으로부터 사회주의자로 매도 당하고 있는 상황까지 닮아 있다.

그의 고민의 깊이와는 반대로 지지율은 연일 하락하고 있다는 보도가 잇따르고, 조직적인 반발까지 가세하여 오바마의 앞으로의 행보에도 많은 어려움이 예상된다. 일단은 기한을 다소 연장하여 타운홀미팅을 통한 여론수렴과 설득을 하고는 있지만, 민주당 내부의 보수진영까지 노골적인 반발을 하는 터라 장담할 수는 없을 것 같다.

미국의 의료시장은 우리와 달리 강제보험으로서 공보험인 전국민의료보험체계가 갖추어져 있질 않고, 65세 이상의 노인들에게 제공되는 의료보장제도인 ‘메디케어’와 빈곤층에게 제공되는 의료보장제도인 ‘메디케이드’를 제외하고는 대부분이 사보험 영역에 맡겨져 있는 것 같다.

전국민의료보험을 내세우던 오바마도 최근 하원에서 잠정 합의된 ‘의료 개혁안’에서는 최초 안보다 많이 후퇴하여 의료보험 제공의무를 면제받는 중소기업을 늘였고, 연방 정부가 저소득층에 제공하는 의료보험 가입 보조금은 줄였다고 한다.

심지어 오바마는 ‘공공보험을 도입할지 말지가 의료 개혁의 전부가 아니고 아주 작은 부분에 불과하다’며 공공보험 도입자체를 포기할 수 있음도 내비치고 있다고 하니, 최근 아프칸 파병과 관련한 대외적인 정책들과 맞물려 오바마의 고민과 위기를 더욱 심각하게 느끼게 한다.

우리의 경험으로 비추어 볼 때 노무현의 ‘지나친 고민’이 결국은 정치적인 영역에서 양쪽으로부터 비난받는 결과를 초래하고, 그를 무마하는 과정에서 확실한 진영가치의 실현에는 성공하지 못한 점을 반추해보면, 지금 오바마가 처해있는 심정이 어느 정도 이해는 간다.

그러나 노무현은 ‘진보적 가치’와 ‘보수적 가치’의 양쪽진영의 측면에서는 실패로 규정할지는 몰라도 확실한 ‘노무현의 가치’는 실현한 듯이 보인다. 내가 생각하는 노무현의 가치는 ‘보다 많은 사람들이 좀 더 사람답게 사는 세상 만들기’였으며, 그 측면에서 개인적으로 일단의 성공을 했다고 평가하기 때문이다.

백악관의 ‘퍼스트 도그(First Dog)’ 선정과정에서도 최종적으로 ‘포르투칼 워터 도그’와 ‘라브라두들’이 선정되었을 때 ‘포르투칼 워터 도그’가 백악관의 낙점을 받은 이유가 ‘라브라두들’은 라브라돌 리트리버와 푸들의 교배견이라는 점에서 제외되었다는 후문까지 있는 걸 보면 피할 수 없는 미국 사회의 뿌리 깊은 갈등들도 엿보인다.

스스로를 잡종견에 비유하며, 미국 사회의 재건을 내세운 오바마가 뿌리 깊은 내부와 외부의 적에 담대하게 대응하여 미국 사회의 희망을 이어나갈 수 있을 것인지 앞으로의 행보가 더욱 주목되는 이유이다. 또한 우리의 의료민영화의 도입문제와 관련하여서도 방향의 설정에 많은 시사점이 될 것 같다.

오늘의 현대 사회는 ‘욕망의 사회’다. 인류의 종말이 있다면 그 시기는 자연재앙으로 인한 ‘지구의 종말’이 아니라 인간 개개인이 탐욕의 꼭지점에 이르는 순간이 될 것이다. 탐욕을 다스리지 않으면 상생은 불가능하며, 탐욕을 다스리는 제도만이 존경받는 권위로서 기록될 것이다.

노무현을 잃고난 후에야 노무현의 가치를 새삼스럽게 확인하고 있는 지금, 오바마를 잃고 오바마의 가치를 알게 되는 너무 늦은 시기 이전에 탐욕의 광기를 끊고, 절제된 욕망의 선순환으로 ‘보다 많은 사람들이 좀 더 사람답게 사는 세상 만들기’의 가치가 실현되길 바란다.

어제의 노무현처럼 계급장 떼고 국민의 신임을 다시 물을 용기와 모든 것을 걸고 자신의 가치를 위해 싸울 진정성이 오바마에게도 있을 것인지 지켜볼 일이다. 브레이크없는 욕망의 질주 속에서 ‘오바마의 가치’가 적절한 제동장치의 역할을 제대로 할 수 있기를 바란다.

2009년 9월 5일 토요일

[생각] 소외와 소통, 그리고 개헌


일반적으로 소외의 현대적 정의에 대하여는 무력감, 무의미성, 무규범성, 자기소외 등 여러가지 의미로 논의되고 있고, 전통적으로는 자본주의하의 노동의 소외를 주장한 마르크스의 소외 개념 등이 있다고 한다.

마르크스의 전통적 개념은 개인의 심리적 상태와 상관없이 객관적인 상황만으로 소외를 정의하고 있는 듯 하고, 어떤 사람들은 소외를 하나의 규범적 개념으로 파악하여 인간의 본성이나 자연법에 근거하여 기존의 제도를 비판하기 위한 하나의 도구로 설명하고 있는 입장들도 있는 모양이다.

또한 소외 중에서도 자기소외를 강조하여 소외란 하나의 사회심리학적인 사실로서 무력감, 무의미성, 무규범성의 체험으로부터 출발하는 개인적 소외감정에 논의의 초점을 맞추는 견해들에 이르기까지 아직까지도 많은 견해들이 있는 것 같다.

결국 논의의 핵심은 소외란 어디로부터 출발하는 것인가의 문제, 즉 제도로부터의 소외인가, 자신으로부터의 소외인가, 그리고 그 극복방법은 무엇인가의 문제가 될 듯 싶다. 개인적인 결론부터 말하자면 소외의 원인은 개인과 제도, 둘 다의 문제라고 생각한다.

마르크스를 비롯한 전통적인 견해들의 배경은 제도의 권위에 개인이 대항하기에 역부족이었던 시기에 기존의 권위를 부정하기 위한 도구로써 소외의 개념이 사용된 듯 하며, 현대에 와서는 어느 정도 민주화의 성과가 시스템의 소통구조로 반영되기 시작하면서 개인의 소외감정, 즉 자기 소외가 부각되고 있는 듯 하다.

그러나 오늘날에 있어서도 소외의 문제는 비단 개인의 문제만이 아니라 개인과 사회, 인식과 제도 모두에 그 원인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사회제도가 소외의 원인인 때에는 외부의 적극적인 개입으로, 개인의 인식과 태도가 소외의 원인인 때에는 자유의지로 극복해야 할 문제가 될 것이다.

그러나 산업혁명 이후 인간의 소외는 기계파괴운동으로부터 출발하여 구조적인 소외로 확장되었으며, 자유주의에 대한 사회주의 강화의 빌미가 되었다. 그 이후 정치 경제적인 영역에 있어서 권위있는 제도로서의 국가가 개입하여 조정자로서의 역할을 하도록 요구받게 된 계기이기도 할 것이다.

우리의 현행 헌법상의 경제질서도 ‘사회적 시장경제질서’로 이해하는 것이 다수 학자의 견해이다. 즉 시장의 자유경쟁에 완전히 떠 맡기는 것이 아니라, 공정한 경쟁이 될 수 있도록 어느 정도의 규제와 조정, 개입이 예정되어 있는 것이다.

오늘날 신자유주의의 이름으로 세계화와 국제화, 글로벌스탠더드를 강조함으로써 그 흐름에 편승하지 못한 많은 사람들이 제도로부터, 개인으로부터 소외되고 있다. 또한 정보화사회의 급격한 진행으로 시간의 흐름 자체가 소외의 진행이 되고 있는 현실이다.

그러므로 각자의 이해관계의 대립은 첨예화 되고, 화합과 통합은 점점 더 어려운 고난의 작업이 되고 있다. 따라서 오늘날과 같은 사회에서 요구되는 최선의 가치는 ‘다양성의 존중’일 것이다. 서로가 ‘서로 다름’을 인정할 때 비로소 소통의 실마리를 찾게 되는 것이다.

소외의 극복이 소통의 목적이고, 소통의 시스템화가 정치의 목적이라고 이해할 때 최근의 개헌논의와 관련하여 우리의 통치구조는 대통령제보다는 의원내각제가 바람직하다고 생각하며, 선거제도는 다양성의 존중차원에서 중대선거구제, 비례대표와 직능대표로 구성되는 상원과 지역대표로 구성되는 하원의 양원제가 보다 합리적이라고 본다.

그리고 현대사회의 변화 속도에 비추어 볼 때 의원을 비롯한 선거직의 임기를 장기화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을 것이다. 선거직의 확대와 선거직에 대한 국민소환제도의 도입, 그리고 헌법개정안에 대한 국민제안권의 도입 등도 소외의 극복을 통한 소통의 시스템화를 위해서 필요적으로 논의되어야 할 사항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역시 제도의 문제라기보다는 지도자의 철학이다. 제도가 어떻든 그 제도를 운영하는 최고지도자의 선택과 행동이 보다 직접적으로 갈등을 키우기도 하고, 줄이기도 한다. 갈등의 원인이 소외이고, 소외의 극복이 소통으로써 갈등을 해소하는 길이라는 것에 진정성으로써 동의한다면 굳이 개헌을 하지 않더라도 이미 제도적 준비는 충분하다고 할 것이다. 오직 할 것인가의 문제일 뿐이다.